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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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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6 [일본여행20] 여행의 끝에서 책을 외치다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15분 타이머를 맞추고 글을 쓸 때가 있다. 상대가 고민이나 걱정을 털어놓으면 갑자기 종이와 펜을 꺼내 15분 타이머를 맞추고 생각나는 대로 손을 멈추지 말고 써 보자고 제안한다. 각자 쓰고 나서 낭독을 하면 그 안에서 뭔가 길이 보이기도 하고 답을 못 찾는다 해도 잠시 한숨 돌릴 수는 있다. 혼자서 글 쓸 엄두가 나지 않을 때도 타이머를 맞춘다. 그러면 어쨌든 시작은 할 수 있다. 머리가 북적거릴 때는 그냥 생각 없이 손을 움직여 보는 게 낫다. 생각과 행동의 거리를 줄이는 나만의 팁이다. 오늘 마지막 글은 타이머를 맞추고 쓰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길 따라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여행이었다. 여행기로 마무리를 해야지 생각했는데 긴긴밤을 여러 사람들과의 수다로 보내서 찬찬..
20221215 [일본여행19] 새로운 시작 일상에서 가장 먼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재잘거리는 아이들이었다. 10월에 아이들에게 영어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면서 이번에는 좀 더 교사의 마인드를 키워볼 생각이었다. 전에 다른 대안학교에서 5년 동안 아이들을 만났던 경험을 다시 끄집어내고, 유튜브에서 선배 영어 선생님들의 팁을 배우고 익혔다. 준비한 게 아이들에게 잘 먹히면 무대 위 배우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요즘은 영어 그림책을 자주 읽어주는데 제멋대로 말 안 듣던 장난꾸러기들이 눈을 반짝이며 몰입하면 얼마나 짜릿한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성장에 책임을 지고 애쓰는 것에는 한참 못 미친다. 교육을 우선순위에 놓기에는 이미 해 오던 신경 쓸 것들이 많다. 학교의 사정으로 급하게 시작하게 되어 이번 학기는 임시로 짠 프로그램을 이리..
20221214 [일본여행18] 아끼는 마음과 매일의 걸음 5일짜리 레일패스의 마지막 날이다. 후쿠오카로 돌아가기 전에 조금 더 기차를 타 볼까 싶어 일본어 선생님이 알려 준 바다 위를 달리는 기차를 타고 시코쿠 섬까지 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기차 안에서 바깥 풍경을 실컷 봤다. 내일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아쉬움에 멜랑꼴리한 기운이 창에 서리는 것 같다. 도착지 다카마쓰에 내려 거센 빗줄기를 뚫고 잠깐 걷다가 다시 역으로 돌아왔다. 일본 사람들도 우동 먹으러 일부러 온다는 명소라지만 노리코상표 아침을 두둑하게 먹어서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시 기차를 타고 신칸센을 갈아탈 수 있는 오카야마로 향하는 동안 비가 그쳤다. 코로나로 2년간 중지되었던 오카야마 마라톤이 있는 날이라고 아침 방송에서 잠깐 보았는데 거리마다 달리기 좋은 가벼운 옷을 입고 삼삼오오 ..
20221213 [일본여행17] 이야기 수집 여행 해외 여행에서는 처음으로 에어비앤비 앱으로 숙소를 예약해 보았다. 사진과 정보도 잘 나와 있고 이미 이용한 숙박객들의 리뷰도 꽤 상세하다. 그걸 바탕으로 느낌과 예산을 잘 버무리면 원하는 숙소의 후보가 좁혀진다. ‘쿠라시키’로 검색해 발견한 슈지상의 숙소는 보자마자 정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주로 시내 가까운 곳에 숙소를 예약해 걸어 다니는 여행을 선호하지만, 여행의 막바지이기도 하고 픽업을 해 준다는 리뷰를 읽고 외곽에 있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선택했다. 앱에서 제공하는 메시지로 슈지상과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국제적인 회사라 그런지 자동 번역 기능도 있어 편리하지만, 오히려 고유명사인 기차역 이름이 이상하게 번역되어 몇 번이나 확인해야 했다. 나카쇼역에 도착해 만나기로 한 남쪽 출구로 나갔더..
20221212 [일본여행16] 빗소리와 욕망 오랜만에 비가 내리고 있다. 수영을 마치고 뭔가 아쉬운 마음에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동네 카페에 들어와 커피 한 잔을 부탁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만 마시다가 언젠가 테스트로 내린 드립커피라며 대접해 준 게 맛있어서 요즘 저녁에는 ‘에티오피아 체첼레’를 마신다. 카카오닙스 향이 입안에 가득 퍼지는 게 좋다. 축축하고 어둑한 창밖에 비치는 반짝이는 자동차 불빛과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어쩐지 낭만적이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쓸쓸함도 운동으로 지친 근육도 나른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푹 자고 일어나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잘 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접영도, 아무리 반복해도 외워지지 않는 한자도 언젠가는. 오노미치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해서 이후의 여행에 잘 집중할 수..
20221209 [일본여행15]Raise your Vibration 이번 여행 처음으로 늦잠을 잤다. 눈을 떴더니 체크아웃 시간이라 깜짝 놀라서 침대에서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잠깐 초능력이 생긴 건지 나갈 준비 하고 짐 싸는 데 5분 걸렸다. ‘킷챠우이’가 문 닫기 전에 아침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부랴부랴 달렸다. 조용한 가게에서 마감 준비를 하던 도이짱이 나의 간절한 표정을 읽고는 활짝 웃으며 두부 완자 아침 정식을 차려주었다. 오늘은 무려 비건식이다. 어제와 같은 주방 가까운 곳에 앉아서 이번에는 도이짱과 수다를 떨며 늦은 아침밥을 먹었다. 가게 이름이 특이해서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다. 일본에서는 커피를 파는 옛날식 다방을 ‘킷샤텐’이라고 부른다. 도이짱은 커피 말고 차를 내는 가게를 할 거라고 ‘샤’를 ‘차’로 바꾸는 말장난을 떠올렸다. ‘텐’(가게라는 뜻) 자..
20221208 [일본여행14]관심이라는 사랑의 행위 오노미치에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는 메시지에 고우는 배웅 대신 드라이브를 시켜 주겠다고 했다. 마침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같이 가자는 다정한 제안이었다. 어제 처음 만난 고우가 배웅을 고집하는 이유를 안다. 배웅과 마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상대를 위한 마음도 있지만 자신을 위한 이유가 훨씬 크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내 잃어버린 동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삶에 대한 태도나 성향이 닮았다. 어젯밤 라면 가게 마타타비에서 돈 없이 여행하는 고우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누구는 술을 누구는 밥을 사겠다고 서로 다투었다. 나는 지갑 속에서 5천엔 짜리 지폐를 꺼내 혹시 기분이 나쁘지 않다면 이 돈을 받아달라고 했다. 노래를 부르고 살아 보겠다고 한 걸음 내디뎠을 때 나는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의 대..
20221207 [일본여행13] 계획은 어긋나야 제맛 오노미치에서 예정된 2박이 끝나는 아침, 마음이 넘쳐서 술렁거린다. 타마짱과 고우가 배웅을 해 주고 싶다고 가기 전에 꼭 연락을 달라고 했다. 오노미치는 빈집 프로젝트로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작은 가게나 이벤트를 이어가고 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지만 굳이 리서치하러 온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다가오는 것들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 숙소 yado의 1층 공유공간에서 스치듯 만난 누군가가 낡은 빈집을 고쳐 여러 가게가 들어가 있는 ‘세 집 아파트’를 만들었다며 들러보라고 했다. 7시 반부터 아침밥을 파는 ‘킷챠우이’라는 가게가 있다는 말에 꼭 가 보고 싶어졌다. 좁은 골목에 손으로 쓴 것 같은 작은 간판들이 가리키는 곳으로 들어가니 작은 마당에 할머니, 엄마, 아빠, 어린이, 강아지(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