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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22

20221212 [일본여행16] 빗소리와 욕망

오랜만에 비가 내리고 있다. 수영을 마치고 뭔가 아쉬운 마음에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동네 카페에 들어와 커피 한 잔을 부탁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만 마시다가 언젠가 테스트로 내린 드립커피라며 대접해 준 게 맛있어서 요즘 저녁에는 ‘에티오피아 체첼레’를 마신다. 카카오닙스 향이 입안에 가득 퍼지는 게 좋다. 축축하고 어둑한 창밖에 비치는 반짝이는 자동차 불빛과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어쩐지 낭만적이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쓸쓸함도 운동으로 지친 근육도 나른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푹 자고 일어나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잘 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접영도, 아무리 반복해도 외워지지 않는 한자도 언젠가는. 

 

오노미치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해서 이후의 여행에 잘 집중할 수가 없었다. 기차는 미련을 놓지 못하는 나를 쿠라시키역에 무사히 데려다주었다. ‘미관지구’라는 표지판을 따라가니 예쁜 물길을 따라 깨끗하게 정돈된 낡은 건물이 즐비한 마을이 나왔다. 전통의상을 입고 작은 배의 노를 젓거나 인력거를 끄는 사람들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 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오는 커플들, 맛있어 보이는 가게들로 거리에는 즐거움의 활기가 가득하다. 쿠라시키는 마을 분위기도 기모노를 입고 활짝 웃는 외국인들도 전주 한옥마을을 떠올리게 했다. 마음을 오노미치에 두고 온 탓도 있겠지만, 전주에 가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한옥마을에는 가지 않는 나는 쿠라시키에도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최대한 조용한 골목을 찾아 서성거렸다. 사진으로 찍으면 죄다 예쁘게 나오긴 하더라. 라면 가게 마타타비에서 만난 키노코군이 쿠라시키의 미술관에 유명한 작품이 많이 있다며 추천해주었는데, 어랏, 목적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그 앞에 서 있다. 들어가 볼까 잠깐 기웃거리다가 피곤해서 그냥 돌아서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껏 거기까지 갔으니 전시를 보고 오는 쪽이 더 좋았을 것 같다.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아갈수록 무작정 남들을 따라 하느라 받는 스트레스는 줄어든다. 단, 새로운 것에 나를 열어두는 것에 인색해지는 건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꽤 오랫동안 ‘나는 드립커피보다 에스프레소를 좋아해’라고 생각했지만, 드립커피에도 취향에 꼭 맞는 맛이 있다는 걸 마셔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처럼 말이다. 나는 시각 정보에 예민하지 못해 미술 작품에서 별 감동을 못 받는 편이다. 이상하게 바깥에서 만 보 걷는 건 괜찮은데 미술관에 서서 여러 작품을 보다 보면 금세 지쳐버린다. 일부러 전시를 보러 가는 일은 점점 없어졌고 어느새 ‘나는 미술관과 잘 맞지 않아’라고 마음속에 확고하게 정해 둔 사람이 되었다. 최근에 서울에서 친구가 산책 삼아 가까운 미술관에 가자고 해서 전시 보다는 산책에 이끌려 따라나섰다. 미술관에 들어갈 때는 분명 흔쾌한 마음은 아니었다. 근데 이럴 수가! 일상을 주제로 하는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따라 걷다 보니 흥미로워서 발걸음이 막 가벼워지는 게 아닌가. 친구와 작품을 두고 함께 감탄하고 각자 느낀 점들을 나누는 수다도 어찌 그리 즐거운지. 전시의 삼분의 이 정도를 보고 나니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져서 마지막에는 일부러 눈앞의 작품에 관심을 꺼야 했지만, 작가들이 자신만의 관점과 스타일로 작품에 아름다움을 꼭꼭 담아둔 게 경이로웠다. 커다란 캔버스에서 빛나는 놀라운 색감은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것 같았고, 작은 스케치들을 그렇게 펼쳐 전시하지 않았다면 그 작가만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의 흐름을 느낄 수 없었을 거다. 미술관을 싫어한다는 고집을 더 부렸다면 그날 산책의 감흥은 내 인생에 들어올 기회를 얻지 못했다. 언젠가 쿠라시키에 다시 간다면 꼭 미술관에 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최대한의 것들을 경험하며 살고 싶다고 해도 불가능한 게 훨씬 더 많다. 시간과 몸의 한계 속을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으로 욕심과 기대를 덜 가지는 선택을 주로 해 왔다. 사람은 보통 젊음 속 욕망에 기대어 무언가 이루어내며 살다가 나이가 들면서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늘어간다. 하지만 이십 대에 절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삼십 대의 나는 욕망이 거세된 듯 굴었다. 이루고 싶은 것들에 쏟을 만한 능력도 노력도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대신 이미 내가 가진 것과 타인의 욕망에 기대어 할 수 있는 것을 딱 즐거울 만큼만 하자는 주의로 지내왔다. 덕분에 별 스트레스 없이 대단한 것들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무언가 쌓아올 수 있었다. 신체의 리듬에 맞게 욕망이 줄어드는 시기에 도착해서 보니 저기 깊은 곳 어딘가에서 아쉬움이 슬쩍 고개를 내민다. 무시해 온 내 욕심과 기대가 방치된 채 어딘가에서 씩씩거리며 떠돌고 있는 건 아닐까. 욕망이야말로 나를 나로 만드는 중요한 실마리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너무 깊이 처박아두어서 곰곰이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나는 어떤 것들을 욕망했을까. 사랑받기를 바라지 않아서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않아서 누군가 나에게 기대를 가지면 매몰차게 거부한다. 멀리 있는 친구, 새로 만나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친절할 수 있지만, 가까이에서 서로 책임을 나누는 관계는 없다. 매일 글을 쓰지만 책으로 엮을 욕심을 부리지 않고, 노래를 만들고 부르지만 앨범을 만들거나 공연 계획을 스스로 만들지는 않는다. 어느 행사에서 오랜만 만난 복지관 관장님이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서 활짝 웃으며 일본어가 너무 재미있어서 잘 지낸다고 대답했다. 최근에 그렇게 밝은 표정으로 근황을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신기하다고 해서 오히려 그 말을 거울로 나를 보게 되었다. 일본어를 공부해 일본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이렇게 순수한 만족감을 가져다 줄지 몰랐다. 그동안 실패가 두려워서 성취의 만족감을 너무 무심히 대하며 살아왔다. 눈이라도 곧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지만, 어는 점에 웬만해선 다다르지 않는 부산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 빗소리를 들으며 생각해 본다. 내가 오랫동안 잃어버린 것은 간절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욕망을 욕망한다. 간절한 것 하나쯤은 가진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