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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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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1 백지의 지도 낯선 곳으로 공연하러 가면 자연스레 새로운 골목과 만난다. 주로 내 공연이 커다란 공연장이 아닌 책방, 도서관, 카페, 학교 같은 곳에서 열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은 공연이라도 언제나 크게 긴장하는 나에게 골목은 평화로운 분위기의 대기실이고 정처없이 걷기는 신경안정제다. 골목 걸으면 동네의 분위기를 예습할 수 있다. 초대해 준 사람들이 매일 걷는 길을 걷고 매일 보는 것을 보면서 미리 인사를 건네 두는 거다. 재밌는 걸 발견해서 공연 중에 이야기를 꺼내면 누군가는 꼭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같은 것을 발견한 사이가 되면 긴장했던 마음이 스르륵 녹아버린다. 부산의 외곽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 노래하러 다녀왔다. 학교는 그 자체로 긴장의 난이도가 꽤 높은 곳인데 학교 주변이 온통 아파트 단지라서 긴장을 풀..
20211229 동네 자랑을 좀 해 볼까 산꼭대기에 있는 공원이 집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이다. 버스의 회차 지점이기도 해서 짙은 하늘색의 시내버스가 천천히 한 바퀴 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빠르게 달려오다가 속도를 줄이게 되는 곳이기 때문일까, 보고 있으면 영화의 슬로모션에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하늘과 산이 맞닿은 곳에서 기사 아저씨가 잠깐 숨을 돌리며 고개를 들면 그 시선 끝에는 바다가 있다. 누구에게나 자랑하고 싶어지는 우리 동네 버스 정류장의 모습이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8분쯤 걸린다. 처음에는 낯설고 불편한 길이었다. 짧은 시간이 몇 년에 걸쳐 쌓이다 보니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시(나태주)처럼 8분 거리의 길과 사랑에 빠졌다. 봄이면 매화, 목련, 아카시아가 릴레이를 이어..
20211227 오래 걸었던 길 끝에는 (2) - 타이베이 어느 나라든 골목이 있다. 한 사람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당연하다. 사람의 몸이 어딘가 바깥과 차단된 곳(집)에서 안전을 누리다가 바깥으로 나가려면 두 발로 걸어서 빠져나가는 길을 만나게 되기 마련이다. 모여 사는 사람들의 적당한 거리가 골목을 만든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만큼 골목이 생겨왔을 것이다.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주차장에서 차로 미끄러져 나가는 방법은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전 세계 인구 대비 자동차 보유 수는 30%를 넘지 않는다. 그러니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사람이 사는 곳에는 골목이 있다. 어느 나라에 가든지 골목을 걷는다. 다른 여행 방법은 전혀 모른다는 듯이 걷기만 한다. 내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는 규모로는 낯선 나라에서도 위화감이..
20211224 버려진 것으로 향하는 눈 처음 바바 씨를 만났을 때 우리가 쓴 언어는 영어였지만, 그가 부산에서 워킹홀리데이를 마칠 즈음에는 한국어로 길고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 후로 몇 년이 흐르고 바바 씨가 사는 곳에 방문했을 때, 내가 더듬더듬 말하는 일본어에 귀를 쫑긋 세우며 집중하던 미간이 떠오른다. 가깝지만 먼 나라였던 일본이 가까워진 것에는 바바 씨의 영향이 컸다. 그를 통해 만난 일본 친구들은 하나같이 너무 이상하고 너무 재밌고 너무 따뜻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홍어 먹으러 오는 미식가, 집 없이 텐트에 사는 소녀 같은 활동가, 친구처럼 깔깔대며 놀게 되는 70대 노부부, 그 노부부 집에서 만난 후쿠시마 피난민 가족, 누구든 집에 묵게 해주는 아나키스트……. 나는 그 친구들을 더 만나고 알고 싶어서 일본어를 계속 연습하고..
20211223 홀로 있으며 연결되는 코로나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했을 무렵 의외로 필요했던 게 집과 친해지기 위한 시간이었다. 좁은 방이었지만 테트리스 실력을 발휘해 가구를 옮겨 보는 것부터 시작했다. 침대의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느낌을 더해주고, 먼지 속에 방치되어 있던 전자피아노를 다시 세팅해서 피아노학원에 가지 않고도 연습을 이어갈 수 있도록 했다. 전자피아노와 책상을 나란하게 배치해서 가운데에 둔 의자에서 피아노를 치다가 뒤를 돌면 책상 앞에 앉게 된다는 점이 구조 변경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여백이 있는 곳마다 그동안 읽기를 미뤄둔 책을 쌓아두어 쉽게 발견해 책장을 펼치기를 기대했다. 책보다는 유튜브에 마음을 더 많이 빼앗겼다는 건 예상된 결과였지만, 타고 타고 흘러간 곳에서 인간이 고기를 싸게 많이 팔겠다고 소, 돼지, 닭을 학대하..
20211222 글쓰기 싫어하는 작가 글쓰기 스트레스로 피부병이 온 적이 있다. 글이 쓰기 싫어서 한밤중에 침대에 누워 펑펑 운 적도 있다. 과거에는 막연한 꿈으로 작가가 되길 원한 적도 있다. 젊은 날의 워너비 노트에 영화감독, 다큐멘터리스트, 뮤지컬 배우, 싱어송라이터, 인권운동가, 여행가, 소설가 등 거침없이 적어 둔 여러 이름들 중에 빈약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던 ‘작가’에 그렇게 큰 소망은 없었을 거다. 돌아보면 좀 부끄럽다. 하고 싶은 것들의 이름표를 덕지덕지 바르고 지냈지만, 그것을 이루는 데 쏟아야 하는 관심과 시간을 계산해 낼 능력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어딘가 기록해 둔 것들, 막연하게 그리는 것들 마저도 기도가 될 수 있는지 그 중 몇 가지는 실현되었다. 어쩌다 보니 싱어송라이터가 되었고, 연극 무대에서 내 노래를 불렀으니..
20211221 가장 작은 사람의 기준 한해에 걸쳐 도서관과 협업 프로젝트로 ‘그림책 콘서트’ 시리즈를 진행했다. 장소는 대부분 부산에 있지만 처음 가 보는 작은 도서관과 책방들이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몇 번 갈아타고 골목을 걸으면 곧바로 기타를 맨 여행자가 될 수 있어 좋았다. 뇌병변복지관에 그림책 콘서트 하러 가는 길에는 동네 친구가 차로 매니저 역할을 해주었다.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차창도 구경할 수 있는 대중교통을 참 좋아하지만, 친구와 수다 떨며 강변을 드라이브하는 편안한 시간도 무척이나 좋았다. 매니저를 자처해 준 동네 친구는 언제나 잘 보고, 잘 듣고, 잘 감탄해서 나를 감탄시킨다. 마침 인생의 새로운 시기에 들어선 그녀에게 다양한 사람과 장면을 보여주고 싶어 함께 가자고 청해 보았다. 내가 맨 처음 뇌병변복지관에 가서 느꼈던 ..
20211220 걷는 섬 오후 두 시, 걷기 딱 좋은 겨울 날씨에 집을 나선다. 겨울 햇살은 짧은 만큼 밀도가 있어 단단하고 따뜻한 빛을 가지고 있다. 아깝고 소중하다. 겨울 산책을 즐기게 된 계기는 부산에 있는 섬, 영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영도의 여행 루트를 개발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처음에는 의아했다. 내가? 여행 기획을? 제안한 친구는 걷고 글 쓰고 노래를 만드는 것처럼 나 다운 여행이면 충분하다고 말해 주었다. 소비자로서의 여행이 아니라 창작자가 되어 보는 여행을 제안하는 것이라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은 ‘예쓰!’를 외친 후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혼자 하면 재미없으니까. ‘영감의 섬, 영도’라는 이름을 지은 우리 팀은 매주 모여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섬으로 걸어 들어가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