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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22

20221214 [일본여행18] 아끼는 마음과 매일의 걸음

5일짜리 레일패스의 마지막 날이다. 후쿠오카로 돌아가기 전에 조금 더 기차를 타 볼까 싶어 일본어 선생님이 알려 준 바다 위를 달리는 기차를 타고 시코쿠 섬까지 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기차 안에서 바깥 풍경을 실컷 봤다. 내일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아쉬움에 멜랑꼴리한 기운이 창에 서리는 것 같다. 도착지 다카마쓰에 내려 거센 빗줄기를 뚫고 잠깐 걷다가 다시 역으로 돌아왔다. 일본 사람들도 우동 먹으러 일부러 온다는 명소라지만 노리코상표 아침을 두둑하게 먹어서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시 기차를 타고 신칸센을 갈아탈 수 있는 오카야마로 향하는 동안 비가 그쳤다. 코로나로 2년간 중지되었던 오카야마 마라톤이 있는 날이라고 아침 방송에서 잠깐 보았는데 거리마다 달리기 좋은 가벼운 옷을 입고 삼삼오오 뛰고 있는 사람들이 괜히 반가웠다. 후쿠오카 가는 신칸센 시간까지 한 시간쯤 남아 역 근처 동네에서 괜찮은 카페 없나 두리번거리며 걸어 다녔다. 

 

일본의 중소도시에는 언제나 회색빛 공기가 느껴진다. 한때 번성하다가 지금은 사람들이 빠진 자리가 크기 때문일 것 같다. 한국의 지방 도시도 비슷한 분위기다. 오노미치가 특별했던 이유는 작은 마을에 다시 사람이 들기 시작해 새로운 활기로 색이 더해지고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비 온 후 거리를 걷다가 어쩐지 눈길이 가는 가게가 보여 뭐 파는 곳인지도 모른 채 들어가 보았더니 대만 음식과 음료를 파는 가게였다. 따뜻한 콩국을 주문하고 앉아 있는데 귀여운 고양이 두 마리를 하나씩 품에 안은 한 커플이 들어온다. 발랄한 산책냥이들이 가게 안을 휘젓고 다니니 갑자기 고양이 카페로 변신했다. 한 마리는 원래 키우던 아이인데 다른 한 마리는 어제 공원에서 자기들을 향해 다가와 애교를 부리던 길냥이라고 한다. 고양이가 집사를 선택해 찾아온다는 도시 전설처럼 하루 만에 가족으로 완전 적응한 회갈색의 아기 고양이는 턱시도 입은 형님 고양이와 함께 멀리까지 산책을 나왔다. 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고양이 매직의 시공간에서 힐링을 잔뜩 받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신칸센에 올라 마지막 기차여행을 맞이했지만, 피로가 제법 쌓이기도 했고 기차 안에서 온라인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도 있어서 신경이 점점 곤두섰다. 이제야 여행이 끝나는구나 실감하면서 후쿠오카 숙소에 도착했다. 마지막 날이니까 편하게 자고 싶어서 호텔을 예약해 두었는데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방에 들어서니 안락함보다 쓸쓸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시내에서 기념품을 조금 더 사고 마트에서 먹을 걸 좀 골라 저녁을 때웠다. 너무 맛이 없어서 우울한 마음으로 TV 리모컨만 이리저리 돌려 보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즐거웠던 여행이 끝나는 게 아쉬웠던 건지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가 아직 덜 된 건지 여행 내내 화창하다가 비와 추위로 변한 날씨처럼 마음도 축축하고 추웠다. 부산 공항에 도착했을 때 마침 공항에서 일하는 동네 친구가 마치 마중 나온 것처럼 기다렸다가 사진을 찍어 주고 퇴근 후 집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운이 따르는 여행이다. 친구에게 두서없이 여행 이야기를 쏟아내다 보니 아쉽고 쓸쓸한 기분이 조금씩 사라졌다. 덕분에 서두르면 수영장에도 갈 수 있을 시간에 집에 도착해서 부랴부랴 짐을 챙겨 나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샤워하고 물속에 들어가 몸을 쭉 펴고 가만히 누웠다. 수영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일주일 동안의 기억들이 골고루 몸속에서 제 자리를 찾아가도록 힘을 빼고 온전히 물에 기대어 둥둥 떠 있었다. 운동으로 개운해진 몸과 마음으로 정말로 여행에서 돌아왔다. 수영은 언제나 정답이다. 

 

밥을 지어 먹고, 수업을 준비하고, 주 3일 출근해 어린이들을 만나고, 수영장에서 접영에 실패하고, 루틴이 된 일본어 공부를  이어가고, 가끔 공연을 하는 일상은 어디 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금방 잠에 빠질 수 있는 포근한 이불이 있는 내 집도, 몸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으면 바로 증상을 드러내는 내 몸도 변함이 없다. 잊지 못할 순간들이 매 순간 펼쳐진 근사한 여행이었지만, 수면과 음식의 질이 좀 떨어져서인지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겼다. 주치의 선생님이 있는 한의원에 예약해서 침을 맞고 약을 지었다. 매일의 일상으로 무사히 돌아오는 것까지 잘 마쳐야 여행에 제대로 된 마침표를 찍는 것 같았다. 

 

돌아와 2주 정도는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사람처럼 들떠서 지냈던 것 같다. 느낀 건 전부 입 밖으로 꺼내야 했던 어린이 이내의 모습이 조금 되살아 나서 어딜 가나 여행 이야기를 멈추지 못했다. 서서히 사그라드는 게 아니라 2주 후 어느 날 갑자기 현실에 쿵 떨어진 느낌이다. 오히려 평소 잘 느끼지 않는 우울감에 마이너스의 상태가 되었다. 아직 공중에 떠 있을 때 여행기를 쓰기로 약속해 둔 게 천만다행이었다. 기분과 상관없이 매일 이어가던 일본어 공부가 몸에 차곡차곡 쌓인 것처럼 기분과 상관없이 매일 써 내려가는 글이 분명 도움이 될 테니까. 그렇게 일본에서 보낸 일주일의 시간이 제법 상세하게 여기에 남았다. 다음은 또 뭐가 있을까. 내 안에 남은 이야기가 어느 날엔 몇백 년 된 느티나무처럼 느껴지다가 어느 날엔 좁쌀만 하게 느껴진다. 과거가 된 이야기는 현재의 내가 무엇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미래의 이야기로 태어난다. 실체를 만드는 것에는 늘 자신이 없지만, 내가 되어 살아가는 것만큼은 꼭 붙잡고 있을 작정이다. 언제부터인가 프로필에 가수나 작가보다는 애호가나 생활가를 꿈꾼다고 적어 두었더니 말이 주문과 기도가 되는 주는 것 같다. 아끼는 마음과 매일의 걸음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야지. 여행이 끝나도 삶이라는 이름의 기다림은 계속된다. 꽃은 다시 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