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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22

20221215 [일본여행19] 새로운 시작

일상에서 가장 먼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재잘거리는 아이들이었다. 10월에 아이들에게 영어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면서 이번에는 좀 더 교사의 마인드를 키워볼 생각이었다. 전에 다른 대안학교에서 5년 동안 아이들을 만났던 경험을 다시 끄집어내고, 유튜브에서 선배 영어 선생님들의 팁을 배우고 익혔다. 준비한 게 아이들에게 잘 먹히면 무대 위 배우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요즘은 영어 그림책을 자주 읽어주는데 제멋대로 말 안 듣던 장난꾸러기들이 눈을 반짝이며 몰입하면 얼마나 짜릿한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성장에 책임을 지고 애쓰는 것에는 한참 못 미친다. 교육을 우선순위에 놓기에는 이미 해 오던 신경 쓸 것들이 많다. 학교의 사정으로 급하게 시작하게 되어 이번 학기는 임시로 짠 프로그램을 이리저리 시도해보는 정도지만, 정말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대로 준비해서 몇 년 후까지 내다보는 선생님이 될 자신은 없었다. 

 

일본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친구로부터 책방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오랫동안 이런저런 협업을 해 와서 서로의 장단점을 꽤 잘 알고, 무엇보다 갈등 앞에서 주로 돌아서는 나와는 달리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 다시 손을 내밀어 주는 친구를 나도 모르는 사이 꽤 신뢰하고 있었나 보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엄청난 속도로 우연들이 찾아왔다.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이미 5년째 독립책방을 단단하게 운영해 오던 다른 친구도 우리와 함께하기로 했다. 게다가 마침 그 주변에 카페 하나가 가게를 내놓았다는 소식까지 전해주었다. 이미 장점을 충분히 알고 있는 장소였고 여러 조건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였다. 여행에서 돌아오니 우리의 막연하던 계획이 현실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맙소사, 내가 책방이라는 장소를 시작하게 되었다! 

 

동업이기도 하지만 따로 또 같이 있는 샵인샵의 모양을 갖출 것 같다. 각자의 바라는 점을 하나씩 이뤄나가면서도 서로의 약점을 서로가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아직 빈 스케치북이고 백지의 지도다. 막막하고 막연하지만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가능성으로 가득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인생을 실험으로 여기며 살아와서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데에는 두려움이 별로 없다. 파도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만남들에 순간의 의미만 부여하고 붙잡으려 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오노미치에서 만난 히로짱의 도넛 이야기가 계속 마음에 남는 건 이제 나도 조금 달라지고 싶기 때문일까. 우리의 가게 안에는 각자의 가게나 프로젝트의 이름이 있을 거지만, 우리 세 사람이 모인 팀의 이름을 정해보자고 했을 때 ‘도넛’이라는 단어를 넣자고 강력하게 주장해 보았다. 어리둥절한 반응의 두 사람에게 ‘로고가 귀여울 것 같아서’라고 둘러댔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몰라서. 

 

얼마 후 내 여행기를 읽은 두 사람의 반응은 귀엽고 감동적이었다. 우선 우리가 모인 대화방의 이름을 갑자기 ‘우주도넛’으로 바꾸어 주었다. 로고를 고민 중이라며 보내 준 스케치에는 동그란 도넛 속에 파도가 그려져 있다. 사소한 말 하나 그저 넘기지 않고 귀 기울여 주는 친구들이 멋있다. 민들레 씨앗 하나를 손바닥에 곱게 올리고 깊은숨으로 정중하게 멀리 불어 주는 두 사람 같다. 내가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것들이다. 진중함, 디테일, 조심스러움, 소중한 것들을 오랫동안 손에 꼭 붙잡고 있는 마음…. 대신 나에게는 실패에 대한 면역, 시도와 우연, 재빠른 회복력이 있으니 우리는 제법 잘 어울리지 않을까. 

 

새로 시작하는 책방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어 학교 일은 더 연장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달려와 와락 안기는 아이들 얼굴과 매달 주어지는 기본 소득을 생각하면 바른 결정을 내린 것일까 아직도 고민이 된다. 아무래도 큰 목소리를 많이 내다보니 목이 많이 상하는 것에 조금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가창력 자랑하는 가수는 아니지만 일단 노래하는 사람이니까. 한 해를 마무리하며, 지난 10년의 ‘길 위의 음악가’ 실험을 돌아보며, 새해와 다음 스테이지를 그려본다. 지금 내가 가진 것과 지금 나에게 주어진 환경만큼으로 무언가 만들어간다는 기본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 

 

내일은 전주 바늘소녀공작소에서 굿바이 공연을 한다. 바늘소녀도 지난 10여 년 이어온 지금의 장소와 작별하고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중이다. 공교로운 타이밍! 내가 아는 누구보다 단단한 나무뿌리처럼 자기 자리와 역할에 두 발을 딛고 두 손을 움직이는 친구다. 내 작은 노래로 감사와 응원을 전할 수 있어서 기쁘고 행복하다. 모레는 소중한 연례행사인 ‘긴긴밤 동지 음악회’를 위해 부여에 간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만들어지지 않던 루틴이 몸에 조금씩 익기 시작한 건 동지를 의미 있게 보내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믿고 있다. 가장 긴 밤을 기준으로 새해를 맞이하던 옛사람들의 지혜를 따를 수 있게 해 준 지혜문고 님 덕분이다. 동지 무렵이 우리 가게의 계약일이라니 그것 또한 공교로운 타이밍! 만나고 노래하고 이야기 담아서 멈추지 않는 에너지들의 작용 반작용을 도넛처럼 모아서 동그라미를 만들 거다. 그래서 뭘 할 거냐고? (나도 아직 잘 모르겠지만) to be continued… (일본어로는 つづ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