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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22

20221213 [일본여행17] 이야기 수집 여행

해외 여행에서는 처음으로 에어비앤비 앱으로 숙소를 예약해 보았다. 사진과 정보도 잘 나와 있고 이미 이용한 숙박객들의 리뷰도 꽤 상세하다. 그걸 바탕으로 느낌과 예산을 잘 버무리면 원하는 숙소의 후보가 좁혀진다. ‘쿠라시키’로 검색해 발견한 슈지상의 숙소는 보자마자 정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주로 시내 가까운 곳에 숙소를 예약해 걸어 다니는 여행을 선호하지만, 여행의 막바지이기도 하고 픽업을 해 준다는 리뷰를 읽고 외곽에 있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선택했다. 

 

앱에서 제공하는 메시지로 슈지상과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국제적인 회사라 그런지 자동 번역 기능도 있어 편리하지만, 오히려 고유명사인 기차역 이름이 이상하게 번역되어 몇 번이나 확인해야 했다. 나카쇼역에 도착해 만나기로 한 남쪽 출구로 나갔더니 신사 할아버지 한 분이 한글로 내 이름을 써서 들고 계셨다. ㅎ의 윗부분을 +로 쓴 게 귀여웠다. 차에 탔더니 규정상 환불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치 숙박비를 괜찮다는데도 굳이 현금으로 돌려주는 게 아닌가. 이번 여행은 인생의 남은 운을 다 쓰고 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만 만나고 있다. 근처에 음식점이 없으니 편의점에서 먹을만한 걸 사서 함께 저녁을 먹는 건 어떠냐고 제안해서 간단한 도시락과 과일을 샀다. 한적한 논과 밭을 지나 2층 주택에 도착하니 슈지상의 발랄한 아내, 노리코상과 겁많은 강아지 메로짱, 새침한 하얀 고양이 하나코짱, 오직 노리코 바라기 고양이 타로짱이 반겨준다. 어릴 적 맡아 본 시골 할머니집 냄새가 나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2층 손님방에 짐을 두고 하나코짱에게 가방 검사를 받은 후 1층 식탁에 둘러앉았다. 저녁 내내 한 자리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슈지상이 장식품처럼 예쁘게 말린 곶감과 노리코상이 농사지은 땅콩을 먹으니 여기가 한국인지 일본인지 구별이 안 된다. 

 

이번에도 역시 ‘일본어 많이 쓰기’ 미션을 이어가면서도 혼자서 영어를 열심히 익히고 있다는 노리코상을 위해 간간이 영어도 섞어서 썼다. 역시 언어 공부는 할머니가 되어도 이어갈 수 있는 좋은 취미다. 독립해서 나간 아이의 방을 언제부터인가 홈스테이 공간으로 쓰기 시작하다가 지금은 에어비앤비의 게스트룸이 되었다. 8년 전 보호소 출신 메로짱을 식구로 맞이한 후로는 좋아하던 여행을 포기했다. 그 대신 전 세계의 다양한 여행자들을 집에서 맞이하면 또 다른 여행이 된다며 웃었다. 식탁 옆 벽에는 커다란 세계지도가 붙어 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물었을 때 소녀 같은 얼굴로 남편에게 대답을 들으라는 노리코상이 귀여웠다. 두 사람이 아직 스무 살이었을 때 (그러니까 1970년대!) 각자 홀로 여행을 하다가 홋카이도 어딘가의 유스호스텔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후 편지로 사랑을 키워나가다가 결혼에 이르렀다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마치 영화처럼 낭만적이다. 부부는 매일 메로짱과 함께 아침 산책을 한다고 했다. 아침 6시에 나오면 같이 갈 수 있다고 해서 약속을 하고 구름 같은 이불이 있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하얀 고양이가 하얀 이불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었다. 오래된 나무 책상 위에는 그동안 머물고 간 사람들이 남긴 감동적인 방명록이 있다. 하나씩 읽다가 나도 간단히 흔적을 남겨 보았다. 매일 욕조에 몸을 담그는 ‘오후로’ 문화의 나라답게 슈지상은 순서를 정하자고 했지만, 사계절 찬물 샤워만 하고 있어 정중하게 사양했다. 두 사람이 목욕을 마치고 나서 샤워하러 들어간 욕실은 반짝반짝 새것처럼 정리되어 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던 숙소였다. 해가 떠오르는 핑크색 하늘을 배경으로 메로짱과 산책을 했다. 꼭 두 사람이 나와야 그제야 신나게 발걸음을 떼는 메로짱이 너무 귀엽다. 보호소에서 처음 만났을 때 다른 강아지들은 누구에게나 가서 안기는데 구석에 숨어만 있던 메로짱을 아무도 안 데려갈까 봐 일부러 선택했다는 말에 눈물이 찔끔 났다. 지금도 손님이 오면 숨어서 짖어대는 변함없는 겁쟁이지만 내 손에 목줄을 맡기고 추수를 막 끝낸 논 옆으로 마구 내달려 주었다. 덕분에 아침 운동 제대로 했다. 산책하는 동네 강아지들을 차례로 만나 인사 나누는 것도 매일의 루틴이다. 견주 친구들이 일상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자기들도 킁킁거리며 뭔가 소통하는 눈치다. 전혀 예상에 없던 내용이지만 강아지와 일본 시골길 산책이라는 멋진 경험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슈지상의 숙소는 일본식 아침 식사가 포함되어 있다. 노리코상이 일본의 전통 발효 음식인 츠케모노를 만드는 모습이 신기해서 영상으로 담아 두었다. 미소시루와 대부분 노리코상의 밭에서 기른 야채들로 만든 반찬이 한가득 올라온 풍요로운 식탁이었다. 저녁 식사 때부터 느낀 거지만 부엌의 분업이 확실하다. 음식을 빨리 먹는 슈지상이 우리가 밥을 먹는 동안 디저트를 준비한다. 밥을 다 먹고 나면 곧바로 커피와 달달한 간식이 차려지고 슈지상이 곧바로 정리와 설거지에 돌입한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래왔다는 듯 모든 게 자연스럽다. 선물로 3집 앨범을 드렸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재생해 함께 들었다. 가사집을 스마트폰으로 바로 번역해 읽으며 정성껏 들어주는 모습에 감동했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여행길에서 슈지상은 기타를 메고 다니던 포크 청년이었단다. 결혼사진 속 앳된 두 사람의 얼굴로 두 사람이 만난 여행과 서로에게 연애편지를 쓰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저마다의 역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소중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나의 여행도 어딘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모두 흘러가는 한때를 살아간다. 다시 돌아갈 수 없어서 알 수 없는 미래를 기약한다. ‘다음에는 남자친구랑 같이 와요’ 기차역에 데려다주며 슈지상이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의 짧은 방문이 두 사람에게도 즐거운 여행이 되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