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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22

20221209 [일본여행15]Raise your Vibration

이번 여행 처음으로 늦잠을 잤다. 눈을 떴더니 체크아웃 시간이라 깜짝 놀라서 침대에서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잠깐 초능력이 생긴 건지 나갈 준비 하고 짐 싸는 데 5분 걸렸다. ‘킷챠우이’가 문 닫기 전에 아침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부랴부랴 달렸다. 조용한 가게에서 마감 준비를 하던 도이짱이 나의 간절한 표정을 읽고는 활짝 웃으며 두부 완자 아침 정식을 차려주었다. 오늘은 무려 비건식이다. 어제와 같은 주방 가까운 곳에 앉아서 이번에는 도이짱과 수다를 떨며 늦은 아침밥을 먹었다. 가게 이름이 특이해서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다. 일본에서는 커피를 파는 옛날식 다방을 ‘킷샤텐’이라고 부른다. 도이짱은 커피 말고 차를 내는 가게를 할 거라고 ‘샤’를 ‘차’로 바꾸는 말장난을 떠올렸다. ‘텐’(가게라는 뜻) 자리에 들어간 ‘우이’는 ‘처음’이라는 뜻인데 자신이 금방 오만해지는 타입이라 첫 마음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가게 이름으로 지었다고 말했다. ‘어, 나도 금방 오만해지는 타입인데!’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꾹꾹 눌러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가는 도이짱의 목소리와 말투가 그녀의 음식처럼 따뜻하게 몸에 스며드는 게 좋아서 자꾸만 질문을 하게 된다. 오노미치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친절한 것 같다는 내 말을 듣고 미소를 짓던 도이짱은 천천히 차를 따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누구나 친절할 수 있을 거야” 도쿄 근교에서 직장 생활하다가 오노미치로 이주한 도이짱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전에는 요리할 시간이 전혀 없는 생활을 하다가 이 마을에 오고 나서 흥미를 발견했고 지금은 좋아하는 요리로 가게까지 차리게 되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배경음악 삼아 오늘도 모든 그릇을 깨끗하게 싹싹 비웠다. 도이짱은 한국 요리를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다음에 오노미치에 오게 된다면 꼭 만들어 주기로 약속했다. (연습을 좀 해 두어야겠군. 아니면 요리 잘하는 친구를 데려가든지 ㅎㅎ) 선물로 가져온 3집 앨범을 주고 싶은데 숙소에 있으니 나중에 찾아가라고 했다. 꼭 다시 만나자며 양손을 크게 흔들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왔다. 

 

숙소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맙소사, 돈을 안 내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부랴부랴 yado로 달려가 히로짱에게 ‘킷챠우이’에 연락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가격 알려주면 여기 맡겨 두겠다고 전해달라 안절부절 부탁했다. 잠시 후 도이짱은 시디와 물물교환하자는 답을 보내왔다. 도이짱에게 선물과 메모를 남기고, 히로짱이 내려준 마지막 커피를 마시고, 배웅 못해 미안하다는 타마짱과의 마지막 통화를 마치고 오노미치역으로 향했다. 그때 내 등 뒤로 들려온 히로짱의 마지막 말이 바로 “오노미치는 여행보다 살기에 더 좋은 곳이야!” 였다. 여행자가 묵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고우가 오노미치역으로 나와 주었다. 배웅보다 훨씬 좋은 노을 선물을 주고도 처음 약속을 잊지 않았다. 이내상이 일본어를 배워서 정말 다행이야, 어제 헤어지며 고우가 말했었다. 내년에 워킹홀리데이로 뉴질랜드에 가고 싶다는 그에게 외국어를 몸에 익히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이라는 걸 보여준 것 같아 기뻤다. 고우가 인화된 사진을 담은 봉투 하나를 건넸다. 여행 중에 찍은 사진 몇 장을 골라 편의점에서 인화한 선물이었다. 삐뚤빼뚤한 한글로 ‘감사합니다’라고, 그리고 영어로 ‘Raise your vibration’이라고 쓰여 있었다. ‘너만의 박동을 일으켜’는 고우의 시그니처 문구였다. 눈물이 나려는 걸 겨우 참았다. 우리 건강만큼은 잘 챙기자고, 어디선가 꼭 다시 만나자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가 움직이는 대합실에서 사진기를 들고 멈추어 서 있는 고우가 오노미치의 마지막 장면으로 남았다. 

 

기차 안에 앉아 사진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고우만의 리듬이 사진과 삶으로 울려 퍼지기를 마음으로 빌고 있는데 타마짱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노미치에 와 주어 고맙다고, ‘자신이 되고 싶다’는 말을 잊지 못할 거라고 했다.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서 엉엉 울어버렸다. 주머니에 손수건이 있어 다행이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마음과 마음이 닿아 넘쳐흐를 수 있다니 정말로 누군가 오노미치에 마법을 걸어 둔 것일까. “부산에 갈 테니까 기다려. 오노미치와 부산을 이어보자!” 타마짱의 마지막 메시지에 “기다릴게. 이어보자! 이을 거야!”라고 대답했다. 순간만 모으고 사는 내가, 과거는 다 내팽개쳐버리는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나를 너무 잘 알아서 솔직히 자신은 없다. 이 순간 할 수 있는 것들을 이어갈 뿐이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고, 일본어를 더 공부하기 위해 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과에 등록했다. 오늘은 몇년 전 대만에서 만난 친구들이 부산에 놀러 오기로 해서 오노미치 친구들이 나에게 베풀어 준 호의를 갚으려 한다. 이상한 계산법이지만 그게 나의 박동이고 리듬이니까. 그렇게 하면 나마저 잊어버린 말이 주문이 되어 우주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만 같다. 내 머릿속으로는 셈할 수 없는 어떤 형태의 결과물이 현재가 되어 나타나지 않을까. 관심이라는 사랑을 담아 나 자신의 박동을 따르는 매일을 살아가다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