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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22

20221216 [일본여행20] 여행의 끝에서 책을 외치다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15분 타이머를 맞추고 글을 쓸 때가 있다. 상대가 고민이나 걱정을 털어놓으면 갑자기 종이와 펜을 꺼내 15분 타이머를 맞추고 생각나는 대로 손을 멈추지 말고 써 보자고 제안한다. 각자 쓰고 나서 낭독을 하면 그 안에서 뭔가 길이 보이기도 하고 답을 못 찾는다 해도 잠시 한숨 돌릴 수는 있다. 혼자서 글 쓸 엄두가 나지 않을 때도 타이머를 맞춘다. 그러면 어쨌든 시작은 할 수 있다. 머리가 북적거릴 때는 그냥 생각 없이 손을 움직여 보는 게 낫다. 생각과 행동의 거리를 줄이는 나만의 팁이다. 

 

오늘 마지막 글은 타이머를 맞추고 쓰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길 따라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여행이었다. 여행기로 마무리를 해야지 생각했는데 긴긴밤을 여러 사람들과의 수다로 보내서 찬찬히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마냥 좋기도 했고 뭔가 빠진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모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득 만났다. 반가웠고 즐거웠고 그들의 삶이 빚어내는 결과들이 더욱 궁금해졌다. 짧은 시간 나누는 이야기로 과연 나는 그들을 만났다거나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삶에 풍덩 뛰어들지 못하고 관찰만 하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오랜 걱정이 다시 머리를 빼꼼 내민다. 

 

건물을 짓고 일가를 이루고 이웃의 곁에 되는 게 선명하게 보이는 바늘소녀지만 여행자인 나는 그 시간 속 희로애락을 알 수 없다. 공연 다음 날 아침 다시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라일락센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함박눈이 내려 기와지붕과 마당이 금세 하얗게 변했다. 창밖으로 한 아저씨가 기웃거리다 들어와서 가게를 찬찬히 둘러보더니 작은 필통 하나를 들고 계산대로 왔다. 바늘소녀가 말을 거니 오래전 와 본 곳인데 아직도 한옥 건물이 그대로 있어 반가운 마음에 들어왔다고 한다. 아직 살아남았다며 웃는 우리에게 아저씨는 “살아남은 값은 누가 치렀나…” 조용히 말한 후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공연 때 관객에게 이 장소의 기억을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몇몇 사람들은 바늘소녀가 한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어 주어 고맙다고 눈물을 흘렸다. 공연 때문에 잠깐 치워 두었던 작고 귀여운 바느질 소품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걸 하나씩 품 들여 만드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거다. 그 안을 가득 채운 온기는 그동안 거기서 손을 움직이고 웃고 화내고 울고 재밌는 작당을 꾸미던 시간과 관계가 치러 준 값이다. 

 

다음 날 눈길을 뚫고 데리러 와 준 지혜 님을 따라 부여에 도착해서는 지혜 님이 초대한 친구들을 만났다. 그간 그림을 그리고 작업물을 만들고 독립 출판을 하다가 만난 사이들이었다. 시골집에 모여서 지혜님이 준비해 둔 먹어도 먹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코스 음식을 먹었고, 코타츠에 앉아 끝이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술과 생존의 균형은 어떻게 해도 맞춰질 수 없는 것일까. 저마다의 작은 해결책으로 잡히지 않는 미래에 더듬더듬 손을 뻗고 있는듯 했다. 라일락 센터의 작별 공연도 4년째 열리는 동지음악회도 한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기대하는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하며 노래를 불렀다. 영원을 모르는 인간이 임의로 과거와 미래 사이에 쉼표를 찍을 뿐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가볍게 대답을 꺼내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저마다 지닌 시간의 무게를 영영 알 수 없는 내 노래가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 말은 무슨 힘이 있을까. 

 

아침에 다 같이 동지 팥죽을 만들어 먹었다. 새알을 빚다가 누군가 귀여운 토끼 모양을 만들었다. 눈같이 하얀 토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귀엽다. 어제 궁남지에서 보았던 귀여운 쇠오리 가족이 생각났다. 다른 오리들보다 작아서 ‘쇠’ 자가 붙었다고 한 분이 알려 주셨다. 서로 알고 있거나 가지고 있는 재능이 달라서 새로운 귀여움을 만날 수 있다. 어쨌든 생존해야 하는 무거운 삶 속에서 사람에게 가장 힘을 주는 건 어쩌면 귀여움일지도 모른다. 지혜님이 소장하고 있는 모인 사람들의 작업물과 각자에게 기억에 남는 올해의 책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양한 장르와 주제의 책 제목을 모두 받아 적어 두었다. 한 사람의 시간과 마음을 다 알 길은 없지만, 그의 마음에 남은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좁고 가벼운 내 세계의 경계를 조금씩이라도 확장해 가고 싶기 때문이다. 

 

책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작은 책방들에 공연하러 돌아다니며 많은 책을 사 모았지만 그만큼 읽지는 못했다. 친구가 나에게 책방을 함께 열자고 제안한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자신이 점점 비어가는 게 무서워서라고 했다. 책으로 자신을 채워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게 느껴졌다. 책이 좋아서 책방을 열었지만 오히려 책 읽을 시간이 없어졌다는 책방 주인의 탄식을 워낙 많이 들어 와서 처음에는 친구의 제안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책과 가까워지고 싶은 우리에게는 어쩌면 최고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책방 시작하기로 하고 처음에는 이벤트 잔뜩 열 궁리만 했었다. 

 

 

새로운 사람과 넘치는 말로 가득했던 여행의 열기를 식히고 보니 나의 좁음과 가벼움이 도드라져 보이기 시작했다. 책방을 시작하는 목적과 방향이 분명해진다. 가장 긴 밤을 보내고 다시 길어지는 해를 맞이하면서 책을 읽고 쓰는 내가 되어 볼 거다. 자신이 되는 것과 나란히 자신을 채우는 것을 잊으면 안 되니까. 시간의 값을 제대로 치르고 삶의 무게를 담은 말을 꺼내는 사람에 가까워지고 싶어서 책방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