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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우치다 타츠루

2022년 2월 21일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지음, 김경원 옮김, 갈라파고스

 

필사와 생각

 

p. 9

…역설적인 이야기가 됩니다만, 일본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숙한 어른’을 만들어내는 데 주도권을 휘둘러온 앎이었다고 봅니다. 

젊을 때 마르크스를 읽고 ‘피가 끓어올라, 사회를 철저하게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믿었던 젊은이는 그 뜻이 좌절되는 경험을 통해, ‘사회를 철저하게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려고’ 애쓰는 인간이 하는 일이 ‘별로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학습합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역사가 보여준 것에 따르면, ‘철저하게 인간적으로 사회를 바꾸자’고 외친 정치 운동은 거의 예외 없이 숙청과 강제수용소를 통해 스스로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청년 시기에 마르크스를 배우고 마르크스주의의 실천 운동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은, ‘인간적이고 공정한 사회를 지금 당장 여기에서 실현하기에 인간은 너무나 약하고 너무 사악하며 너무 비열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합니다. 이것은 아주 귀중한 경험적 앎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그들은 그런 인간을 ‘용서하는’ 것도 배웁니다(그들 자신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일본에서 ‘마르크스를 읽는’ 행위가 청년의 성장과 의식화의 필수 단계로 여겨져온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p. 43

마르크스는 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를 읽으면 스스로의 문제를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이것이 마르크스가 지닌 ‘교육적’인 측면이라고 생각해요. 

 

p. 58

마르크스의 무엇에 착목하는가? 즉 사상인가, 인격인가, 심리인가, 행동인가, 문체인가, 사회적 영향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하는 점은 읽는 사람의 관심에 따라 다르겠지요. 어딘가에 해답이 오롯이 있을 듯한 알기 쉬운 문제 설정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독해의 내용은 독자의 ‘상상력’과 ‘창조력’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 아닐까요? 

 

p. 60

그런데 앞의 편지에서 우치다 선생님은 논리의 비약을 ‘불편함’이 아니라 ‘붕 뜨는 느낌’으로 고양시켜주는 점에 마르크스의 ‘마약성’이 있다고 했어요. ‘붕 뜨는 느낌’이라는 표현이 재미있네요. 이렇게도 읽을 수 있고 저렇게도 읽을 수 있는 애매함, 둥실둥실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불쾌함이 아니라 도리어 상상력을 이끌어낸다는 말씀……. 그렇게 이해해도 될는지요?

 

p. 83

앞의 편지에서 쓴 것처럼 마르크스의 정치학과 경제 이론의 상당 부분은 현대에 들어와 충분한 실용성을 잃게 되었어요. 역사적 상황이 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그 어떤 천재라도 ‘이제부터 일어날 모든 일’을 예측하고,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세우는 것은 가능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마르크스의 이론으로 잘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마르크스가 죽은 뒤에 줄줄이 나타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마르크스의 뛰어난 점을 깎아내리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만큼 다양한 사안을 훌륭하게 설명해준 ‘인류의 지적 은인’에게 ‘하나라도 설명하지 못한 사례가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 것과 같다’는 식으로 매몰차게 몰아붙이는 것은 대인배가 할 짓이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마르크스 이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어. 마르크스의 이론은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도 오류가 없다니까’ 하며 눈에 핏발을 세우는 원리주의자도 ‘대인배가 아닌’ 점에서는 마찬가지예요.

 

아침에 모닝페이지를 쓰며 ‘요즘 나에게 뭔가 부족한 것 같은데 그게 뭐지’라고 생각하다가 ‘깨달음’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오래전에 친구들과 각자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의심의 여지 없이 ‘깨달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에 놀랐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서 내가 무너지는 기분, 그래서 자신이 확장되는 듯한 기분,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감동으로 심장이 뛰고 살아있구나 감각하게 되는 그런 순간, 나는 행복하다고 느꼈다. 과거형인 이유는 최근에는 그런 순간을 추구하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닝페이지가 신기한 건 노트 위에 쓰인 것이라면 그게 어떤 모양으로든 일상으로 튀어나온다는 점이다. 며칠간 책도 안 읽고 글도 안 쓰고 지내다가, 문득 지난주에 빌려온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를 펼쳤다.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과 이시카와 야스히로라는 분이 서간 형식으로 마르크스를 소개해주는 책이다. (아무 정보 없이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 이름이 보여서 빌려봄) 두 사람에게 마르크스는 ‘머리가 좋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필요하다든가 학문의 울타리를 벗어난 ‘큰 뜻’이나 ‘용기’, ‘깨달음’이 필요할 때 펼쳐 읽는 책이라고 했다. 특히 조금 경박해 보이는 표현을 (일부러) 쓰는 우치다 선생님은 ‘아카데믹 하이’나 ‘어떤 생각 앞에서 엉덩이가 들썩인다’고 쓰셨는데, 거기에서 아침에 어렴풋이 느낀 ‘요즘 나에게 부족한 것’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새로운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언제부터인가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 머리가 번쩍할 만큼 새로운 생각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재밌어서 술술 읽힌다. 아무리 마르크스를 전도(?)하는 책이라도 비판할 부분은 확실히 짚고 넘어간다든가, 애매함을 부족함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성숙함으로 바라보는 우치다 선생님 특유의 ‘태도 중심적인 태도’(?)가 역시나 너무 좋다.

 

p. 149

보세요. 소외론의 출발점이 ‘자신의 비참함’이 아니라 ‘타인의 비참함’을 목도한 경험이었어요. 마르크스는 “우리를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들을 소외된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우리의 임무”라고 주장한 것이지요. 이렇게 윤리성이 높다는 점 때문에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의 풍상을 견디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p. 152 ~3

마르크스가 지향하는 것은 그러한 ‘조야한 코뮌주의’가 아니라, 가장 인간적이고 훨씬 문명적인 코뮌주의입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인 본질의 현실적 획득으로서의 코뮌주의”인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인용한 구절을 보고 ‘어라?’ 어쩐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은 없나요? 네, 그래요.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하고 닮았지요.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 말이에요. 

링컨은 이 연설을 마르크스의 초고가 쓰인 지 20년쯤 지난 때쯤 했어요. 과연 링컨은 <경철 수고>를 읽었을까요? 알 수 없지요. 하지만 남북전쟁이 끝났을 때, 런던에 있던 마르크스가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승전을 축하하는 전보를 친 것은 사실이에요. 축전을 보냈을 정도니까 링컨이 전보를 받고 보좌관한테, “이봐, 이 마르크스라는 사람이 누구야?” 하고 묻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마르크스와 링컨은 동시대 사람이지요. 또 각각 상대방의 정치사상과 정치적인 비전을 알고 있었고 서로 존경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아마도…….) 이런 일은 ‘미국사’와 ‘정치사상사’를 시간적 배열에 따라 따로따로 공부해서는 좀처럼 시야에 들어오지 않지요. 어떤 역사적인 시점에 서서 그보다 나중에 일어난 사건을 우선 괄호에 집어넣고 미래는 알 수 없다는 전제를 하고 나서, 그때 눈에 들어오는 것, 들려오는 소리, 느껴지는 공기를 상상으로 추체험하지 않으면 여간해서는 이런 일을 이해하기 어려워요.

 

이십 대 때 우리 집 마당 카페에서 철학책 읽기 모임을 한 적이 있다. 과학철학을 가르치는, ‘투명한 직관’이라는 아이디를 쓰시던, 얼굴이 까만 선생님이 차를 마시러 오셔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권의 책을 함께 읽었는데 유일하게 생각나는 한 권이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였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책이 좋았다. 세월이 흐르고 레비나스의 이름을 다시 만난 건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을 통해서다. 우치다 선생님은 레비나스의 제자를 자처해 프랑스에 가서 레비나스를 (딱 한 번) 만나고 스승을 연구하고 책을 번역하고 풀어서 설명하는 책을 쓰신다. 덕분에 나는 어려운 철학을 이야기 할아버지한테 자장가 듣는 기분으로 편하게 즐긴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름만 익숙하던 마르크스 사상을 아기 새가 어미 새에게 먹이를 받듯(음식을 씹어서 주는 건 비둘기의 방식이었던 것 같은데) 잘근잘근 소화하기 쉽게 전해 받는다. 오늘은 ‘노동의 소외’에 대한 마르크스의 뜨거운 마음을 소개받았다. ‘자신의 비참함’이 아니라 ‘그들의 비참함’으로 세상을 바꾸는데 자신의 전부를 쏟는 마음은 윤리적이라고 한다. ‘타자의 얼굴’에서 출발하는 레비나스를 사람들은 ‘윤리철학자’라고 부른다. 학교 다닐 때 나는 남몰래 윤리 수업을 좋아했다. 교회 다닐 때 노래하고 춤추는 거보다 가슴이 뛰는 설교를 기다렸다. (아닐 때가 더 많긴 했지만) 기독교의 사랑도, 불교의 자비도, 도교의 무위도, 마르크스의 ‘유적 존재’도 세상에서 힘을 획득한 적은 한 번도 없어 보이지만, 누군가 자아를 내려놓는 순간(윤리가 인간에게 드러나는 순간)을 이야기 속에서 흘깃 만나면 언제나 눈물이 난다.

 

p. 208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교회에서 목사나 사제가 하는 말이 ‘거짓말’ 이라는 뜻은 아니에요. 그곳에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일종의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신이나 족장, 예언자, 메시아에 대한 긴 ‘이야기’를 경청하고 거기에 감동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고, 이윽고 거기에서 끌어낸 식견이나 원칙에 의거하여 자기 자신의 사고나 행동을 조절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그것은 ‘현실’이 되는 것이니까요.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체적으로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활 실천 속에서 그것에 ‘활력을 부여’하지 않는 한, 신앙은 성립하지 않아요. ‘이야기’는 ‘이야기’만으로는 기능하지 않으니까요. ‘이야기’를 ‘현실’의 형태로 바꾸어주는 것은 고유명을 가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해석과 실천이에요. 나는 액자의 기능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자연에 있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출현해요. 정직한 사람에게도,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람에게도 비는 공평하게 내리지요. 하지만 ‘액자 안에 있는 것’은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지요.

‘이봐, 이건 액자라구……’ 이런 지시는 그때부터 해야 할 작업 - 액자 속에 보이는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까 하는 작업 - 을 개인의 책임으로 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에요.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는 일을 상상해볼까요? 평범한 벽이 있고 거기에 액자에 넣은 그림이 걸려 있지요. 벽에는 ‘얼룩’이 묻어 있거나 ‘금’이 가 있지요. 그것은 벽을 보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의미를 전해줍니다. ‘얼룩’은 어딘가 빗물이 새어들었다는 뜻이고, ‘금’은 벽 자재가 낡았다는 것을 뜻하지요. 하지만 액자 안의 그림은 그렇지 않지요. 거기에 그려져 있는 것에는 ‘만인 공통’의 의미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흘깃 본 뒤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고 지나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앞에 서서 몸속 깊은 곳에서 전율을 느끼지요. 액자란 ‘그 안에 있는 것에 대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의미를 길어내시오’ 하고 지시해요. 즉 메시지를 해석하라는 지시를요. 그러니까 액자를 어느 곳에 갖다 댈 것인가, 무엇을 액자 안에 넣을 것인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군요. 

 

p. 217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요약하면,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것, 상상하는 것, 표상하는 것’이 적절한가 아닌가는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들’에 따라 ‘그들의 현실적인 생활 과정으로부터’ 검증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들’은 살아 있는 몸을 가지고 있어요. 고유한 생리 과정도 피할 수 없고 욕망도 있으며 허약하기도 해요. 아무리 이데올로기가 ‘그렇게 하라’고 명령해도, 아무리 그 지시대로 따르고 싶어도, 살아 있는 인간인 이상 하루에 몇 시간은 잠을 자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목욕도 해야 하는 법이죠. 어느한도를 넘어서 무리하면 몸이 상하고 상처를 입으면 피가 나고 어딘가 지나친 부하가 걸리면 뼈가 부러질 뿐 아니라 언젠가 수명이 다하는 것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머릿속으로 아무리 훌륭한 일을 생각해도 몸은 머리를 따라가지 못해요. ‘살아 있는 몸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을 뽑아내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p. 222

‘지성을 단련하는’ 일은 물론 마르크스를 달달 외우거나 옳다고 믿는 것이 아니에요. 마르크스는 도대체 현실 세계 - 그것은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초기 단계였어요 - 의 어디를 보고 무엇을 찾아내려고 했을까? 성장하고 변화해가는 마르크스의 언어를 따라가면서 그 점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그 결과 마르크스가 도달한 지점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이 잡히면 그것이 진정 옳은 것이었는가를 자신의 머리로 판단해가는 일. 그런 훈련을 해나가기 위해서 마르크스를 재료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지성의 단련’이겠지요. … 상대가 마르크스든 아니든, 글을 읽을 때는 거기에 쓰여 있는 내용을 수동적으로 그냥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두뇌를 단련시킬 수 없어요.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말한 마르크스 자신이야말로 항상 그런 자세로 비판적인 정신을 가지고 선배 사상가들의 지적 성과와 씨름하고자 한 사람이었어요. 

한편, 이 책을 훑어봤다면 느꼈을 테지만, 마르크스는 글을 쓰면 쓸수록 그 내용이 확확 변해가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그렇게 내용이 변화하고 탐구의 깊이가 심화되어갈수록 더욱 사안을 정교하고 치밀하게 파악할 뿐 아니라 이전의 사고 방식을 과감하게 전환시키기도 하고, 과거에 도달한 지점을 가차없이 내던져버리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어요. 마르크스는 언제나 그러한 진화를 거듭하는 사람이었지요. 사태가 이렇다면 누구라도 마르크스의 저작 전부를 ‘믿는’ 일 따위는 가능하지 않겠지요? 왜냐하면 40세의 마르크스를 50세의 마르크스가 부정하고 있는데, 도대체 누가 마르크스를 믿는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까? 이런 문제에 금방 직면한 테니까요.

 

아직 다 읽지 못했는데 도서관에서 반납 안내 문자가 왔다. 부랴부랴 뒷 부분을 읽었다. 유물론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꾸만 근본적인 질문으로 스스로를 공격하던 오랜 시간을 위로받을 만한 ‘액자’ 개념을 발견했다.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의 괴리가 늘 괴로웠다. 자신이 언제나 미웠고 구제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근본적인 해답을 찾아 헤맨 결과다. 인간은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다만 계속 찾고 궁구하고 해석하고 할 수 있는 만큼 삶으로 옮기고 반성하고 다시 시작할 뿐이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훌륭한 일을 생각해도 몸은 머리를 따라가지 못해요. ‘살아 있는 몸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을 뽑아내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시니  나는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을 좋아할 수밖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타인과 사안을 향해 절대적인 옮음을 강요하는 목소리를 자주 만난다. 특히 인터넷 상에서. 그럴 때마다 어딘가 좀 이상했다. 세상에 정말 그런 완벽한 생각과 대답이 존재할까. 내가 똑똑하지 못해서라는 생각도 자주 하지만, 요즘은 똑똑하지 못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한다. 마르크스를 아주 조금 배웠으니, 사회와 타자의 삶을 외면하지 않고 의문을 가지고 깊이 고민하고 대안을 찾고 그것을 또 의심하고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대답을 찾는 ‘태도’를 몸으로 익혀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