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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친애하는 미스터 최>, 사노 요코

2022년 2월 3일

<친애하는 미스터 최>, 사노 요코, 최정호 글, 요시카와 나기 옮김, 남해의봄날

 

필사와 생각

 

p.58~59

‘저는 오늘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까요? 제가 지금 불행한 원인 중 하나는 나이를 듬뿍 먹었다는 사실이에요. 요즘 모든 것을 아주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데, 사람이나 인생에 대해서 너그러워졌다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겠지요. 

특히 ‘젊음'에 대해 너그러워져서 젊은 혈기로 잘못을 잇달아 저지르는 사람, 젊기 때문에 건방지게 행동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젊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 젊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 젊기 때문에 예쁜 사람을 저는 눈물을 흘릴 듯한 얼굴로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맙니다. 

이해심이 넘치는 것처럼 행동하는, 징그러운 아줌마가 되어 버린 것 같아요. 그리고 혹여 제가 젊은 남자를 사랑해버리지 않을까 하고 날마다 저 혼자 걱정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쩌지요? 정말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통틀어 보면 저는 그렇게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서 죽을 때도 더 살고 싶어 할 거예요. 훗날 할머니가 되는 것도 즐겁게 기다리고 있어요. 노망든 체해서 사람들에게 심술부리고 미움을 받는 것도 재미있지요. 

그리고 가끔 아주 맛있는 도시락을 예쁜 보라색 보자기로 싸서 벚꽃놀이를 갈 거예요. 거기서 할아버지가 된 옛 애인을 만나 다소곳이 웃으면서 점잖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속으로는 여전히 야한 생각을 할 거예요. 어쩌다가 친구 장례식에 가도 스스로는 아직 죽지 않는다고 믿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일부러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나도 금방 그리 갈게요"라고 작게, 그래도 사람들이 잘 들을 수 있게 말할 거예요. 

저는 할머니가 된 뒤에도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별로 불행하지 않아요. 지금부터 몸을 단련해 두어야겠어요.’

 

친구 A가 추천해 준 게 생각나 도서관 간 김에 빌렸다. 편지나 일기로 된 책을 좋아하지만 때로는 너무 사적이라 읽기 힘든 부분도 있다. 베를린에서 만난 한국 남자와 일본 여자가 우정을 나눈 40년간의 편지라니, 누가 썼는지 모른다 해도 흥미로운 내용일 것 같았다. 이 경우에는 사노 요코가 워낙 유명하니까 반대로 최정호라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졌다. 최근 이슬아 작가님의 에세이를 읽으며 특유의 솔직함과 과감함이 짜릿해서 역시 미래세대의 감각인가 하면서 감탄했었다. 그러나 1938년생 사노 요코의 편지글을 읽으며 세대 타령을 후회했다. 프롤로그로 최정호 님이 사노 요코를 회고하며 쓴 글에서 두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사노 요코가 ‘귀 막고 소리 끄고 눈만 남기고' 보는 철저한 눈의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시선의 출발이 위에 있지 않고 언제나 아래에 있어 ‘불경스럽고, 외설스럽고, 금기를 무시하는, 신성모독의, 그러나 그래서 더욱 익살스럽고 장난스럽고 재미있는 글’이 빚어진다는 것. 

 

그 두 가지 모두 내가 갖고 싶은 것의 리스트에 있다. 스스로 취약하다고 느낀다는 뜻이다. 언제나 눈의 쾌락에 관심이 없어서 친구들에게 좋은 경치를 양보하는 게 나만의 자랑이었고, 친구들이 싫어하는 도덕, 윤리 수업을 비밀스럽게 좋아하던 유교걸 기독교인(왜 거리가 먼 두 가지가 같이 있지?) 세월을 너무 길게 보냈다. 글을 쓰려고 보니 이 두 가지가 엄청난 장애물로 느껴졌다. 자꾸만 관념적으로 흐르거나 착한 결론을 내리고 만다. 친구 A의 최애 작가 (중 한 명. 최애가 하나라는 법 어디에 있냐) 사노 요코의 책을 좀 찾아 읽다 보면 아주 조금은 배울 수 있으려나. ‘솔직한 글은 지루할 틈이 없다'라는 말을 언제나 믿고 있다. ‘공격'이나 ‘비판'의 솔직함은 영영 가지고 싶지 않은, 여전히 나이브한 윤리파이지만 조금씩만이라도 시선의 출발과 도착을 요리조리 옮기고 넓혀 나가고 싶다. 올해는 사노 요코 언니에게 좀 배워 볼 테다.

 

p. 79

1977.11 

다시 뵙게 되어 오래 사는 보람을 느꼈습니다. 저는 미스터 최를 만나면 이상하게 제가 사는 것의 천재인 것 같다는 자부심이 생겨 좋습니다. 시시하지만 듣기 좋은, 제 기분이 좋아지는 일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늘 노력합니다. 예전에 미스터 최가 무심코 저를 ‘사는 것의 천재’라고 해 주신 것을, 미스터 최가 살아 있는 동안 잊어버리지 않을 거예요.

 

p. 84

1978.11.5

저는 드디어 마흔이 됐습니다.

제가 열여덟 살 때, 서른 살 여자는 무슨 재미로 사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미스터 최가 마흔일 때 저는 미스터 최를 어른으로 존경하고 있었지만 제가 마흔이 되어 보니까 그때 미스터 최도 그다지 어른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람 본성은 과히 성장하지도 변하지도 않고 끝없이 자기 자신에게 다가가는 것 같아요. 미스터 최가 앞으로 아무리 출세를 해도, 부자가 돼도, 세상 여자들이 다 미스터 최에게 구애해도 놀라지 않겠습니다. 

 

p. 104

미스터 최, 당신이 서양 문화를 깊이 연구하는 것은 괜찮지만 서양 사람들의 정신에는 절대로 다가가지 마세요. 서양인의 합리 정신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예스’와 ‘노’를 명확히 해서는 안 됩니다. 명확히 하면 답이 하나밖에 없어요. 답은 예스와 노 사이에 끝없이 존재한다는 게 동양인의 사고방식이에요.

서양인이 보면 동양인은 으스스한 존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예스와 노를 구별 못 하는 후진국 사람들이라고 생각할지 몰라요. 그들은 그들의 논리로 잘라 버리겠지요. 예스와 노를. 그런데 동양인은 처음부터 예스도 노도 없으니 잘라 버리지 않아요. 그것은 문어발처럼 태연하게 다시 돋아나요. 

…아무리 유럽 문화를 깊이 아셔도 미스터 최는 불가사의한 미소를 잃지 마세요. 

 

p. 111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사상도 신념도 아니고, 생활이 아닐까요? 

여자에게는 생활이 있을 뿐이에요.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생활이에요. 

생활 이외의 것에 꿈을 거는 남자들과 생활밖에 모르는 여자들이 어떻게 하면 가정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요? 

 

p. 150

저는 화려한 마음을 가지고 수수하게 살고 있답니다.

 

책 속에서 두 사람은 나이를 먹어간다. 특히 책의 주요 화자인 사노 요코의 경우에는 에너지도, 분위기도, 처한 상황도, 문체도, 생각도,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차 변해갔다. 너무나 선명한 그녀다움을 간직한 채, 세월의 바람과 갈구에 끊임없이 벼려지는 게 애달프기도 하고 눈부시기도 했다. 한편 전혀 변하지 않기도 했다. 다작의 이유도 생활 때문이라고 했다. 

 

 

 

질문

 

- 솔직함과 유머는 길러질 수 있는 걸까? (갖고 싶어...) 

 

 

요약

 

사노 요코가 최정호와 40년 간 주고 받은 편지들. 젊은 시절 이국의 나라에서 처음 만난 남자는 여자를 ‘사는 것의 천재'라고 불렀다. 그녀는 그 말을 오래오래 간직했다. 15년쯤 지난 후 여자의 편지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사상도 신념도 아니고, 생활이 아닐까요?’ 사노 요코는 삶의 모순 앞에서 한쪽을 선택해 안락함에 머무르기보다 온몸으로 맞서고 느끼고 썼다. 사는 것의 천재다운 삶의 방식이다. 그녀에게서 그 가능성을 먼저 발견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스터 최는 보물 편지의 주인이 되었다. 

 

얻은 것, 깨달은 것

 

타샤 튜더의 말년을 담은 영화가 떠올랐다. 너무 아름다워서 비현실적이고 여성스럽다고 비난받던 타샤 튜더의 그림은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의 도구였다. 어린 시절의 불운, 출산과 육아, 노화와 관계의 변화를 마주하며 사노 요코는 어느 감정 하나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삶을 다만 삶처럼 살았다. 한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 한 사람이 드러나는 게 신기하다. 그녀가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았던 솔직함과 유머가 부럽다. 현재의 나는 끊임없이 과거가 부끄럽다. 밟아 온 모든 자리마다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오늘이 내 생의 가장 젊은 날이라는 참인 명제는 죽을 때까지 매일의 오늘을 부끄러이 여기게 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나의 생활은 사노 요코 언니를 닮았으면 좋겠다. 오늘의 부끄러움을 낱낱이 느끼고 쓰며 삶을 삶처럼 살아갈 수 있게.

 

실천 항목 

 

- 쓰고 쓰고 또 쓰자

- 편지도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