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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서점의 일생>, 야마시타 겐지

2022년 2월 7일

<서점의 일생>, 야마시타 겐지 지음, 김승복 옮김, 유유

 

필사와 생각

 

p. 31~32 

책방은 입장이 공짜다. 달리 말하면 갤러리나 마찬가지다. (책방 주인이 되고 보니 그게 서러워질 때도 있다. 처지에 따라 이렇게 바뀌다니) 그렇기에 호기심이 왕성한 꼬마가 날마다 드나들었던 것이겠다.

문턱이 낮고 공짜에 자극적인 정보가 넘쳐나는 곳. 이제는 개인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새로운 정보나 낯선 세계에 접속하는 시대다. 그런 기기로 더욱 멀고 깊은 세상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오감으로 느끼는 체험이 없다.

고바쇼보(저자가 어린시절 시간을 보내던 책방)에 들어가 입구의 육중한 문을 쾅 닫는 순간 느꼈던 눈앞이 갑자기 환해지는 경험. 오래된 형광등의 어두운 조명. 종이와 먼지가 겹겹이 뒤섞인 독특한 냄새. 눈앞에 펼쳐진 압도적인 책의 바다. 둔탁하게 울리는 계산대 소리. 책방주인과 단골이 나누는 이야기들. 책을 책장에 꽂는 소리. 책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

책을 집중해서 읽고 있으면 주변 모든 소리는 이야기 속의 효과음처럼 작고 멀게 들린다. 책방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 틈에서 나도 조용히 책장을 넘긴다. 

저녁 찬거리를 사러 온 김에 책방에 들른 주부, 일하는 시간인데도 책방에 어슬렁대는 회사원, 귀갓길에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책방에 온 학생. 시간이 많은 노인들. 돈도 애인도없어 보이는 청년, 다들 사회생활을 하면서 생긴 마음의 빈틈을 채우려 책방에 들른 것 같았다. 책방은 초등학생이 처음 접하는 ‘세상’이라는 쌉싸래한 존재와의 접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본에는 책방 에세이(?) 분야가 있을 정도로 책방과 관련된 책이 많다고 한다. 책을 많이 읽지 않는 (나 같은) 사람도 책방에 가거나 책 사는 건 좋아하는 걸 보면 ‘책방’이 가진 특별한 무언가가 분명 있을 것 같다. 코로나 시대 전에는 나름 책방전문가수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몇년의 공백이 주는 영향력을 무시 못 하겠다. (신간을 내지 못했다는 이유도 있을 것 같고) 여전히 책방에서 노래하는 게 가장 좋다. 작년에 했던 잊지 못할 두 번의 공연도 다 책방에서였다. 발전하거나 나아가지 못하면 뒤처지는 기분이 휩싸인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는 조금만 여유 부려도 뒷걸음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휴우. 

 

일본의 책방 에세이 중 1980년(내가 태어난 해다) 출간된 ‘나는 책방 아저씨’(취직하지 않고 사는 법 시리즈 중 하나였다고 함)라는 책이 가장 유명한가 보다. 저자인 하야카와 요시오는 록밴드 출신의 음악가인데 20년간 하야카와 서점을 운영하다가 지금은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단다. 현재 70세. 이후 세대의 책방지기들에게 꽤나 영향을 많이 끼친 모양인지 책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 전에 소소책방 방주님이 알려줘서 유튜브로 노래를 찾아 들어본 적도 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책보다 책방지기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엄마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꽃과 나무보다 엄마를 더 좋아했던 것처럼, 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책방지기들을 더 좋아하는 거지. 

 

‘서점의 일생’은 서점이 아니라 책방지기인 야마시타 겐지 라는 사람의 일생이 담긴 책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밖에서는 내내 말을 하지 않는 아이였다든지, 고교 졸업 후 가출해서 (남성이라 가능한) 이런저런 잡일을 전전하며 살아보았다든지, 친구와 독립 사진 잡지를 만든 경험이 있다든지(전혀 팔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들려준다. 이제 막 책방을 시작하기 위해 월세가 27만 엔(대략 270만원 이상)인 장소를 계약하는 데까지 읽었다. 누군가의 특이한 이력을 보면 재밌기도 하지만 평범했던 내 삶이 좀 시시해진다. 내 삶도 누군가가 본다면 특이한 구석이 한가득 있을 텐데도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어버리는 거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 책만이 자신의 친구였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가장 부럽다. 가장 갖고 싶지만 절대 가질 수 없는 한 가지가 바로 책 속에 파묻힌 어린 시절이니까. 

 

그래서인지 책방지기를 존경하고 책을 사 모으고 최대한 책을 주변에 쌓아두고 있다. 다가갈 수 없지만 언저리에라도 머물겠다는 의지가 드러나는 것일까. 앞으로는 책을 좀 만들어볼까 한다. 특이한 이력 없이도 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1번, 그래서 만든 책을 들고 좋아하는 책방지기들에게 인사하러 가고 싶은 마음이 2번, 40대부터는 좀 더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3번이다.

 

 

p. 141~142 

채용 조건은 분위기 단 하나. 광적인 지식 따위 필요 없다. 서점원으로서 경험도 필요 없다. 그런 건 새로운 가게를 하는 데 방해가 된다. 지식이나 경험은 현장에서 나중에 얼마든지 익힐 수 있다. 필요한 것은 가게와의 궁합이고 느낌이며 최종적으로는 인간성이다. 

그들은 나에게 없는 것을 충분하게 갖추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나의 남성적인 가게 개성을 중성적이고 부드러운 것으로 변화시켰다. 나 혼자서는 들이지 않았을 상품이나 잘 알지 못하는 세계를 가게에 끌어들였다. 

나도 가게가 조금씩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에 감화되어 내 상품 선별도 바뀌었다. 초창기에 놓았던 너무 튀는 것들은 빼고, 좀 더 겉멋이 빠지고 생활감 있는 상품을 늘리고 가게 안에 있던 여러 특수 장치도 제거했다. 외관의 자동차 문양도 밝고 화사한 것으로 조금씩 변화시켰다. 

 

우메노와 알게 되어 충격이었던 것은 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자연스럽게 자신이 부족한 인간이라고 말한 일이었다. 남자로 태어나 자라면서 그때까지 약한 소리는 셀 수 없을 만큼 했지만, 남자 대 남자로 얼굴을 마주하고 자신이 부족한 인간이라고 털어놓을 용기는 없었다. 약점이 될 만한 말은 항상 삼키면서 외면해 왔다. 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그걸 말할 수 있는 그에게 나는 무언가 가르침을 받은 느낌이었다. 앞으로 나도 그렇게 살겠다는 게 아니라, 이런 자연스러운 사고를 가진 남성이 지금 사회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서점의 일생'에서는 본격적으로 ‘가케쇼보' 책방을 꾸려가는 이야기가 등장했고, 상황은 예상보다 언제나 나빴고, 어쨌든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중이다. 자기를 비우고 누군가의 색이 더해지는 장면이 좀 뭉클해서 오늘의 구절로 남겨보았다. 책방을 시작하고 했던 수많은 작당들은 그럴듯해 보이는 게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그냥 했는데 의외로 이어지는 것도 있었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우연히 시작되는 상황도 있고, 꿈에 그리던 무언가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역시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좋아하네, 두근거리며 읽어나갔다. 작당이 좀 고파졌달까.

 

 

p. 178~185

모월 모일 눈 

라디오 속에서 젊은 밴드 멤버가 1960년대 음악을 말한다. 무척 해박하다. 그렇지만 너무 잘 아니까 조금 위화감이 든다.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야기에 호소하는 힘이 없다. 나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 마음이 서늘해진다. 동시대의 음악이나 문학은 모두 손닿는 곳에 굴러다니고 있는데.

 

모월 모일 비

지방 모텔에서 맞이하는 밤. 평소 생활과 전혀 다른 밀실. 여기에 혼자 있으니 내가 매일 무엇을 해서 수입을 얻는 사람인지 한순간 생각나지 않았다. 

 

모월 모일 흐림

좋은 것과 만나면 좋은 것을 만들고 싶어진다. 좋은 문장, 좋은 영화, 좋은 음악, 좋은 그림, 좋은 만화, 좋은 사람, 좋은 가게. 내가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상관없이 좋은 것을 만들고 싶다는 윤곽이 생긴다. 그 윤관의 내용물이 뚜렷해질 무렵 좋은 것은 어느새 완성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모월 모일 비

일전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가르쳐 준 지식. 오늘 그 얘기를 했더니 그이는 자신은 그런 적 없다고 말한다. 틀림없이 그 사람 입을 통해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 사람은 잊고 있다. 알고 있던 지식 그 자체를.

 

모월 모일 맑음

은행이 합병하더니 멀어졌다. 술집에 경쟁점이 생겨 술집 전쟁이 일어났다. 찻집이 없어지고 부동산 중개소가 되었다. 대형 잡화점이 매수되어 이름이 바뀌었다. 일하는 거리의 모습이 바뀌어 간다. 아무리 정치에 흥미가 없어도 아무리 경제에 흥미가 없어도 생활권은 경기라는 파도 위에 떠 있다는 걸 풍경이 나타내고 있다. 

 

모월 모일 맑음

몸이 아프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 음악도 필요 없다. 안타깝게도 책도 필요 없다. 사실은 다정함이나 따듯함이 필요하지만, 의외의 것이 괴로움에서 잠깐의 해방으로 이끌어 준다. 집중을 강요하지 않고 선택을 강요받지 않고 눈 앞에 있는 사람을 즐겁게 하려고 힘쓰는 것. 텔레비전이다. 텔레비전이 병실에 설치되어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건강해지면 텔레비전을 보지 않겠지만. 

 

모월 모일 흐림

현명한 척하는 아저씨는 그 시점에서 현명하지 않다. 

 

모월 모일 비

물에 약하다. 바람에 약하다. 열에 약하다. 책은 약하다. 

 

모월 모일 맑음

하세가와 겐이치 씨의 결혼 파티에서 사회를 보기로 했다. 단벌 정장을 입고 현장까지 벚꽃 사이를 걸어간다. 도중에 들른 헌책방에서 오가와 구니오의 수필을 사서 주택가를 걷는다. 예전 단행본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제본으로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이다. 그런 책을 왼손에 들고 집을 바라보면서 걷고 있자니 포교할 집을 찾는 선교사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가와 구니오는 기독교인이었지. 나는 목사가 아닌 사회자였다. 

 

모월 모일 맑음

큰 신세를 진 분의 부탁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현지 집결하여 준비 사항을 듣는다. 육체노동 한 발짝 전의 일. 땀을 흘렸다. 휴식 시간의 캔커피가 맛있다. 일당을 받았다. 자신의 몸 하나로 돈이 발생한다는 사실. 물건을 들여와서 팔아야 이익을 얻는 돈 버는 법에 익숙한 사고에는 큰 감동이다. 무슨 일이 있든 몸만 움직일 수 있다면 살아갈 수 있음을 재확인한 날. 

 

모월 모일 흐림

중고생 시절, 야간 경기를 보면서 맥주를 마시는 중년 아저씨들을 까닭 없이 경멸했다. 노동을 경험하기 이전의 편견이었다고 반성하며 나도 맥주를 마신다. 

 

모월 모일 비

세실 테일러의 다큐멘터리를 보러 가다. 설득력이란 말 기술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일상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모월 모일 흐림

근처 약국에 붙어 있던 ‘건강’이라는 산문시. ‘건강이란 몸에 이상이 없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라는 문장. 건강이란 명랑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내용이 리듬감 있는 긴 문장으로 적혀 있었다.

 

 

책 중간에 모월 모일로 시작하는 짧은 단상의 일기가 나열된 걸 보고 이건 뭐지 했다. 처음에는 통일성이 갑자기 사라지는 느낌이 들어서 조금 삐딱하게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점점 읽다 보니 그 짧은 일기들이 너무 좋아서 다 베껴 써 두고 싶어졌다. 처음에는 열에서 벗어나 서 있다가 꾸지람을 듣는 아이처럼 느껴졌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포인트 액세서리처럼 책을 더 빛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어느 날의 일기인 ‘물에 약하다. 바람에 약하다. 열에 약하다. 책은 약하다’라는 문장을 주제를 가진 어느 챕터에 넣는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하면 하이쿠 같은 글맛이 전혀 안 날 것 같다. 통일성 있는 글을 쓰지 못한다는 자책을 오래 해와서 인지 이상한 위로를 받아버렸다. 

 

한편으로는 요즘 느끼는 일기의 중요성도 한 번 더 되새기게 되었다. 저자가 책방을 운영하는 10여 년의 시간을 책으로 모으는 동안 훨씬 더 많이 남아있을 저런 단편적인 일기들의 도움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 인상적인 건 책방을 운영하는 동안을 묘사할 때 깊게 깔려있던 괴로움과 불안이 가득한 어둠의 정서가 책방을 접으며 시작된 창작의 기운이 묘사되면서 글이 리듬이 완전히 달라지는 모습이었다. 동네 자영업 동료들과 모여서 한탄과 작당을 나누던 중 탄생한 프로젝트팀 ‘호호호좌’ 이야기가 전환의 시작이었다. 팀과 함께 교토에서 카페를 만들어 운영하는 사람 7명을 인터뷰해 만든 책 (유행하는 스타일을 최대한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카페를 시작한 날’을 소개할 때는 저자의 밝게 웃는 얼굴이 글자에서 보일 정도였다. 인스타에서 호호호좌도 검색해보고 일본 아마존에서 책도 검색해봤더니 실제의 이미지를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일본어 공부하고 가장 좋은 건 일본어로 검색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내용을 전부 읽어내는 건 아직 불가능하지만서도) 

 

만들고 만나는 삶을 정북쪽에 세웠다. 만만클럽(이름 계속 고민중)에 수많은 이야기가 파도처럼 오갔으면 좋겠고 그 모든 순간이 기억이 되고 선물이 되길, 더욱 기대하게 되었다. 책을 덮으며 이런 마음이 들었다니.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윤택한 독서를 해 버렸다. 역시 도서관에서 눈 맞아서 데려오는 책이 짱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