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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렌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2022년 2월 14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렌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지음, 김수현 옮김, 마메시스

 

필사와 생각

 

p. 5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morimotoshoji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대여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혼자 들어가기 어려운 가게 같이 가기, 게임 머릿수 맞추기, 꽃놀이 명당 미리 잡기 등 사람 한 명분의 존재가 필요할 때 이용해 주십시오. 고쿠분지역에서부터 트는 교통비와 식음료 비용만(돈이 들 경우) 받겠습니다. 아주 간단한 응답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2018년 6월 3일 Twitter

 

p. 14

나는 어째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서비스를 시작하려고 생각한 걸까.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심리 상담사 고코로야 진노스케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퍼트린 <존재 급여>라는 개념일지 모른다. …말할 것도 없이 급여란 노동의 대가이며, <뭔가를 한> 대가로 치러진다. 하지만 고코로야는 <급여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가치는 있다>라고 글을 썼다. 

 

p. 20~21 

한편으로 나라는 사람은 어쨌든 일에서 보람이나 새로움을 찾으려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만들어 온 설문을 변형해 돌려쓰는게 아니라 새로운 소재를 고안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자기 안의 발상이란 한정된 법이고 소재도 금방 다 떨어지기에 보수가 생기지 않는 취재가 별도로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다시 스트레스를 낳는다. 쌓이는 스트레스가 수당처럼 반영되어 보수도 올라가면 좋은데 그건 쉽지 않다. 따라서 발생하는 스트레스의 양이 내가 받는 보수의 양을 추월하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와서 그 일이 하기 싫어진다. 이제까지 살아오며 맡아 온 일이라는 일을 죄다 그런 식으로 내던져 왔다. 

 

p. 69~70

사회인으로서 누나의 스펙은 그녀가 지원한 회사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지만, 나에게 있어서 누나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그런 갭은 사회적 척도로 잰 아무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마어마한 스트레스가 된다. 나는 세상에 맞추려고 하면서 생겨나는 그런 스트레스로 사람이 죽는 것을, 혹은 본인이 갖춘 힘이 점점 약해져 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런 의미에서도 나 자신이 굳이 <00를 할 수 있다> 같은 표명은 굳이 하지 않으려고 한다. <무엇 무엇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세상의 가치에 질질 끌리듯 어필을 하기 시작하면 그것 자체의 가치와 간극이 생겨난다. <뭔가 할 수 있어서 가치가 있다>는 식으로 기존 가치에 끼워 맞춰지고 만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애초에 나는 <할 수 있는 일>보다 <못 하는 일>, <흥미가 있다>보다 <관심이 없다>, <즐겁다>보다 <괴롭다>, <나는 이것을 할 수 없다>라거나 <이것은 하고 싶지 않다>라는, 이른바 소거법으로 내 삶을 선택해 왔다. 내가 허용할 수 있는 것과의 경계에 선을 그으면서 나라는 존재의 윤곽이 명확해지고 진심이 드러났다. 

 

p. 78

또 하나 이유를 든다면 내가 호기심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호기심이 <강하다>가 아니라 그냥 <있다>다. 혹은 호기심을 향하는 대상이 얕으면서 넓다고도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마니아나 오타쿠로 불리는 사람은 어느 특정 분야나 작품에 깊이 푹 빠져서 거기에 막대한 돈을 투하하고 에너지도 쏟는다. 나에게 대여 의뢰를 하는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적잖게 있었는데, 이벤트에 동행하거나 얘기를 들어주려고 만나면 그들에게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느꼈다. 한편 나는 누가 취미는 뭐냐고 물으면 대답을 어물거릴 정도로 특정한 무언가에 집착하는 게 없다. 그 대신 비교적 무엇이나 흥미롭다. 그래서 앞 장에서 언급한 <아이 엠 스타!>라는 생판 모르는 작품의 게임 대회에 나가는 것도, 질릴 수는 있어도 나가는 일 자체가 괴롭지는 않았다.

 

친구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책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연극으로 본 적이 있는 ‘필경사 바틀비’를 떠올렸다. 내용이 특별히 기억에 남지는 않았지만,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대사는 제법 강렬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기 시작했는데 책장이 술술 넘어가고 읽을 수록 ‘앗 이것은 내가 바라는, 나에게 꼭 맞는 삶!’이라는 생각에 빠져든다. 앞전에 끙끙대며 읽던 ‘능력주의와 불평등'도 떠오른다. 능력주의의 대안을 찾는 사회 실험 버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책 속에는 렌탈을 의뢰받은 다양한 트윗 내용과 후기로 올린 트윗이 소개되고 사이사이에 ‘렌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의 생각이 무채색 톤으로 이어진다. 특유의 ‘무'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문체에 드러나는 게 재밌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0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 노력해서는 또 안 되는 노릇이다. 

 

의외로 폭발적인 반응이었나보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원했고, 그는 최소한의 호기심만 챙겨서 일회적이고 그냥 곁에 있는 ‘존재'를 제공했다. 과학 전공자인 그는 자신의 역할을 ‘이산화 망가니즈'라는 촉매에 비유한다. 과산화수소는 자연 상태에서도 산소를 만들어내지만 이산화 망가니즈라는 촉매를 사용하면 산소를 만드는 효율이 조금 높아지다고 한다. 사람이 스스로 무언가를 해 내는 것이 가장 그럼직한 과정이지만, 세상에는 혼자서 척척 해 내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그런 사람이 극소수이지 않을까) 욕망의 화력이 낮아서 타자의 존재가 꼭 필요한 나 같은 사람에게 렌탈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 정도의 타인은 훌륭한 촉매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친해서 배려할 필요도 없고, 앞으로의 관계를 고려할 필요도 없고, 이것저것 조언을 하지도 구하지도 않는, 스타벅스에서 자기 작업하는 모르는 사람보다는 조금 더 신경 쓰이는, 하지만 실제로 버젓이 존재하는 낯선 타인. 

 

충분히 재밌지만 읽을 수록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마음이 드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회성의 낯선 타인을 필요로 하게 만드는 복잡다단한 세상이 조금 슬퍼졌기 때문일까.

 

p. 200

돈이 없으면 알 수 없는 일도 있지만 돈을 포기함으로써 돈 외의 것이 손에 들어오게 되었고, 돈이란 결국 편리하고 쓰기 쉬운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p. 208

컴퓨터나 네트워크를 사용한 시스템이라면 <정해진 문구를 보내준다>는 작업을 거의 1백 퍼센트 확률로 어려움 없이 완수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간의 경우에는 우선 그 작업을 <의뢰>로 수리해야 한다는 장애물이 있다. 의뢰인은 <이런 시시한 의뢰를 받아 줄까?> 하고 걱정할지 모르고, 받아 준다고 하더라도 <DM을 보냈을 때 아무것도 님이 뭐 다른 일을 하느라 못 보면 어떻게 하지>나 <지정한 문구를 틀리지 않고 보내 줄까?> 등 불안에 떨지 모른다. 그런 다양한 불확정 요소, 바꿔 말하자면 인간의 결함을 뛰어넘어 의뢰가 실행되는 것이기에 그 과정과 수고에 정 같은 것이 드는 게 아닐까 싶다. 

 

p. 225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의 기본적 기능은 <한 사람분의 존재를 일시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그 기능만이 발휘되는 전형적 의뢰는 <집 청소하는 것을 지켜봐 주기>거나 <일을 땡땡이치지 않는지 보고 있어 주기> 같은 종류다. <지켜봐 주기>를 바란다고 해서 실제로는 보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그런 의뢰를 하기에는 극단적으로 말해 나에게 인간의 생김새와 인간의 질량이 있으면 충분하다. 역시 높은 스펙은 전혀 필요 없다.

 

편집자와 주고받은 메시지가 맺음말이 된 게 너무 웃겼다.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글을 쓰는 게 아무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과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쓰지 않겠다는 고집을 부렸다. 예의를 갖춘 편집자는 이런 저런 대안을 제시하는데 아무것도 님은 ‘저 아닌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뭐라도 괜찮습니다!’ 유쾌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그 주고받은 문자의 캡쳐가 맺음말이 되었다. 나도 나 아닌 사람이 하는 일은 뭐든 좋은데!, 하면서 책을 덮었다. 누가 집에 놀러와야 겨우 청소라도 하는 나, 같이 하자고 약속해야 뭐라도 하는 나를 자책하고 살아온 긴 시간이 좀 아까우려고 한다. 인간의 생김새와 질량이 있으면 충분한 존재로서 서로서로 잘 지켜봐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