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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능력주의와 불평등>, 박권일 외

2022년 2월 5일

<능력주의와 불평등>, 박권일, 홍세화, 채효정, 정용주, 이유림, 이경숙, 문종완, 김혜진, 김혜경, 공현 지음, 교육공동체벗

 

필사와 생각

 

p. 8 

…능력주의의 위험을 말하면 많은 이들이 납득하기 어려워한다. “한국 사회에선 세습이나 불법·편법적 특혜 탓에 능력주의가 제대로 관철되지 못하는 게 더 문제 아닌가?”

물론 전근대성은 여전히 잔존해 있다. 그러나 근대가 되었다 해서 전근대적 문제가 일시에 사라지지는 않는다.(여성 차별과 여성혐오의 기나긴 역사를 보라). 또한 전근대의 문제가 해소되지 못한 것이 근대의 문제를 방치해야 할 이유도 될 수 없다. 사람들은 지위 세습에 대해 크게 반발하면서도, 막상 세습과 다르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는 능력주의 시스템에 대해선 지나치게 옹호적이다. 신분제와 세습이라는 것이 절대 악처럼 묘사될수록 능력주의는 절대 선인 양 오인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능력주의에 대한 확신이 과도한 사회에서는 사회 불평등에 대한 인지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박권일) 

 

p. 19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활발하게 작동하면서 체제를 정당화한다. 능력주의가 평등을 대체하면서 불평등에 대해 분노하는 운동도 능력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능력주의는 분명히 차별이지만 차별로 인식되지 않고 오히려 ‘평등', 더 정확히 말하면 ‘공정'으로 인식된다. 학력·학벌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결국에는 개인의 진정한 능력/실력을 평가해야 한다는 이야기나 ‘고졸 성공 신화' 따위로 치환되는 것이 그 예이다. 대학 입시 제도에서 ‘공정성'이나 ‘신분 상승의 기회 확대' 등을 말하면서 시험의 강화를 주장하는 것도 그렇다. 이미 한국 사회는 능력주의를 벗어난 평등을 상상하고 이야기하고 만들기가 어려워진 듯하다. 

 

p. 28

…한국 사회에서 득세하고 있는 사고방식을 요약하면 이렇지 않을까. ‘존엄과 권리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너의 자격과 능력을 증명하라. 되도록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험으로.’

이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고 나서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시험을 준비하느라 고통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한국 사회의 능력주의 담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노력', 그 과정에서의 고생과 인내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개개인에게 노력과 인내를 강조하기 때문일 터이다. 그래서 ‘공정한 능력주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서사를 들여다보면 보상 심리와 인지 부조화적 태도가 곧잘 발견된다. 자신들이 이렇게 노력하고 고생했으니 마땅히 그러한 고통에 충분한 의미가 있어야 하며, 누군가가 그런 노력과 고생 없이 결실을 얻(으려 하)는 것은 부당하고 억울하다는 것이다. 

 

p. 31

우리 사회나 삶은 개개인이 참가하는 경주나 시합이 아니다. 경주나 시합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부일 뿐이다. 사회와 삶 전체를 경주로 보면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의 속도와 기록을 재기 위한 시험과 평가로 생애를 채워 나가야 한다. 불필요한 경쟁과 무의미한 고통이 다수에게 요구된다. 이에 집중하다 보면 평가와 차별의 룰을 만들고 시행하는 권력은 가려지게 된다. 능력주의는 단지 공정한 경쟁의 룰이 아니라, 통제·관리의 수단이며 평가하고 선발하는 측(국가, 기업 등)의 이익을 위한 시스템이다. 능력주의 속에서 사람들은 평가하고 선발하는 힘을 가진 측이 제시한 교육과정에 따라 스스로 학습하고 통제받으며 자신을 그 틀에 맞추려고 애써야만 한다. 불평등과 차별에 대해서도 정당하고 공정한 것이라 순응해야만 한다. (공현)

 

p. 40~41

마치 모든 개인이 공정한 출발선에서 능력을 다투고 정당한 보상을 받는 양 하는 능력주의는 허구이다. 개인마다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 하는 분야도 다르고 각 분야 안에서 개인이 발휘하는 능력도 다르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사실이다. 그렇지만 개인의 능력 차를 인식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내용이 있다. 첫째, 그 어떤 개인의 능력이라도 사회·경제·문화 의존적이며, 둘째, 그렇기에 개인의 능력 차이가 개인의 보상 독점이나 개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로 이어져서는 안 되고, 셋째, 개인 능력의 차이는 불평등이 아니라 인류 공영의 자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p. 52

능력이 아니라 희망에 따라, 적성에 따라, 간절한 필요에 따라 교육받을 권리를 가지면 안 될까? 외딴 지역에 살면서 의사의 필요성을 절감한 이가 의학교육을 받을 권리는 권리일 수 없는가. 남 보기엔 이상한 그림 실력이라도 자기 적성에 따라 미술교육을 받으려한다면 이것은 권리가 아닌가. (이경숙)

 

 

최근에 문득 내가 흥미를 느끼고 반응하는 것들이 ‘엘리트 남성의 창작물'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해피 아워'라는 영화를 본 게 시작이었다. 나는 10여년 전에 영화를 ‘끊었다'고 말하며 그 이후로는 일부러 영화를 찾아 본 일이 거의 없다. (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만을 예외 사항으로 두고 있었다.) 최근 우연히 보기 시작한 ‘해피 아워'는 꽤 충격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아 다시 영화가 좀 보고 싶네'라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검색을 하다보니 하마구치 류스케는 도쿄대,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와세다대, 그리고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은 도쿄대 출신이다. 그러니까 세 사람의 공통점은 일본 명문대 출신의 남성이라는 점이었다. 어라, 이게 뭐지, 싶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남성 중심주의와 능력주의를 내재화하고 취향을 만들어 온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빌려 온 책이 인스타 피드에서 보고 기억해 둔 책 ‘능력주의와 불평등'이었다. 

 

책을 읽기 전에 다른 취향을 하나 떠올리고 살짝 안심하기도 했다. 가까이에서 내 손과 피부에 닿아 열광하는 창작물의 경우에는 여성이 만든 독립 혹은 아마추어 창작물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엘리트 남성의 창작물 ‘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좋아하는 것들 중에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런 납작한 평가 속에 세 사람을 집어 넣은 것에 사과를 해야 할 지도! 복합적인 인간을 단편적인 모습으로 정의내리려 하면 안 된다. (무슨무슨 ‘주의'에는 늘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능력주의에 반대하는 것에는 두 손 두 발 들어 찬성하는 입장이다. 동물해방과 장애해방을 다룬 ‘짐을 끄는 짐승들'(수나우라 테일러)을 읽고 남은 인생 내가 늘 되돌아보며 주의를 기울일 한 가지를 발견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장애중심주의, 능력주의의 뿌리라 할 수 있겠다. 완전히 찬성하는 이야기들인데 반 정도 책을 읽으며 몇 번을 앞으로 되돌아갔는지 모르겠다. 잠을 충분히 잤는데도 졸음이 계속 쏟아졌다. 논문이나 학술지에 실리는 글이 가진 아카데믹한 형식을 너무 오랜만에 읽기 때문이었다. 평소같으면 내 ‘능력'을 탓하며 읽었을 텐데 좀 짜증이 났다. 이제는 글에 ‘쓰는 사람'이 드러나지 않는 글을 읽을 수 없게 된 것 같다. 아무리 옳은 주장이나 사상이 주인공인 글이라 해도 쓰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글은 나에게 말하는 글 같지가 않다.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이지, 싶은 거다. 내가 어렵게 배우고 익혔으니 읽는 너도 지식인의 문법을 배워 오렴, 하는 태도라면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형식이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 있는 거 아닌가. 내일 남은 반을 읽으면 이 책의 형식 말고 내용에 대한 기록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p. 108

당시 IMF 사태 이후의 한국 사회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모든 공동체적 관계와 사적 친분과 연결을 통한 사회 안전망이 다 무너지고 각자도생의 개인주의가 새로운 사회 윤리로 구축되고 있던 시기였다. 가족, 친구, 이웃 관계가 다 무너지고, 개인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능력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 시대가 왔음에도 학벌없는사회(시민단체)는 ‘학벌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말하곤 했다. 우리가 꿈꾼 것은 학벌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건강한 시민사회'였고, 학벌이 아니라 능력으로 대접받는 것이 공평하다 생각했다. 이런 화법은 결과적으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학벌주의는 능력주의에 의해  패퇴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평등주의에 의해 무너졌어 야 했다. 능력주의는  민주교육·평등교육의 이념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었음에도,  능력주의가 학벌주의의 반대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점은 우리의 한계였고 오류였다. 당시에도 ‘스펙'이라고 불리는 사회 현상은 문제가 되고 있었고, 성적 경쟁이 스펙 경쟁으로 변질된 것을 비판했지만, 그것이 총체적인 사회 통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위력을 발휘하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다. 2016년 해산까지 학벌없는사회의 경험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재편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투쟁과 패배, 한계와 오류의 경험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p. 112~113

무엇보다 이들은 기득권을 세습한 보수 기득권층보다 자력(?)으로 취득한 자유주의 진보 기득권층에서 더 강하다. 능력주의는 고소득 전문직의 ‘강남 좌파'나 능력있는 ‘민주 시민'들이 추종하는 자기 신앙이 된다. 이들은 인종 차별과 성차별 등에는 민감성을 보이지만 능력 차별과 계급 차별은 잘 인식하지 못하거나 회피한다. 능력주의 신화가 계급 차별을 가려 주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이 평등을 깨트리고 서열화를 추구하는 이유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데 서열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평등은 인민을 다수로서 단결하게 한다. 서열화는 피지배 계급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도록 만든다. 

 

p. 117

…신자유주의적 통치 이데올로기이자 중간 계급의 계급 재생산 원리로서 능력주의는 ‘금융 자본주의'와 밀접히 연결된다. ‘능력대로 일하고 능력대로 번다'는 것은 월가Wall Street에서 탄생한 원칙이다. 이때의 능력이란 장인적 숙련이나 기예, 인격적 탁월함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순수한 ‘개인의 능력'을 말한다. 이 능력은 공동체적 협업이나 공유 역량과는 분리되어 있고, 시간과 공간 및 사회적 관계로부터 이탈해 있다. 

 

p. 123

‘역량 개발 패러다임'... 이 용어는 들을 때마다 섬찟하다. 인간의 신체/생명/에너지와 모든 능력이 무한히 채굴(개발) 가능한 역량의 광도가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노동력만 계약의 대상이었다면, 신자유주의 체제는 노동력을 포함하여 잠재력을 끌어낼 ‘자기계발' 능력과 지속 가능한 능력 개발을 위한 재생산 능력으로서 자기 관리 능력까지 요구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동기가 없으면 사람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채굴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동기가 부여되어야 하되, 그것은 자본의 실제 목표를 드러내지 않도록 은폐하면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역량 개발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동기여야 한다. ‘경쟁’이 그 동기가 된다. 신자유주의적 착취의 동력은 ‘경쟁'이었다. 경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회의 ‘피라미드 구조'다. 다단계 회사의 골드 회원이 다이아몬드 회원이 되고 다시 플래티넘 회원이 되는 것처럼, 피라미드를 한 계단씩 올라갈 때마다 우리는 평가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입시와 취업 승진이 모두 평가의 거름망으로 변질된다. 그러나 그 거름망은 정말로 우수한 사람을 걸러 내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평가는 모두가 결과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순응의 장치다. 그것이 평가의 본질적 기능이며, 그래서 ‘공정성'이 중요해진다. 공정성의 신화는 평가 권력을 유지시키는 데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거짓말이다. 공정성이란 위계의 구조를 지탱하기 위해 도입된 기술적 장치로서 애초에 ‘평등'에 반하는 것으로, 정치적 의미로서의 평등과 하등 관련 없는 ‘게임의 룰' 같은 것이다. 도박판에서 룰을 잘 지킨다고 그것을 평등한 게임이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p. 129

또 하나 이루어 내야 할 중요한 교육 개혁 과제가 있다. 그것은 교육과정 안에서 노동 계급의 관점을 확장해 내는 것이다. 중등교육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고등교육에서 노동자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진보 학문과 좌파 이론이 도입될 수 있도록 ‘가치 투쟁'을 해야 한다. 지금 대학의 커리큘럼은 1987년 이후로 일시 진전했던 1990년대 보다 훨씬 후퇴한 수준이다. 기술 과학이 인문 사회 과학을 주변화했을 뿐 아니라 미래학이 역사학을, 문화연구가 사회과학을, 행정학이 정치학을, 경영학이 철학을 도태시켰다. 이 과정에서 노동 계급의 문학, 역사, 철학이 ‘자연스럽게' 사라졌고, ‘통치론'만 남았다. 아무리 노동자 민중의 자녀가 무상으로 대학에 들어가도 거기서 배우는 것이 모두 자본가의 세계관뿐이라면, 자기 계급을 혐오하게 만드는 그런 고등교육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학벌없는사회’(1998년~2016년)라는 시민모임에서 활동했던 저자가 단체의 시작과 해산을 톺아보며 학벌주의에서 능력주의로 옮겨가는 과정을 찬찬히 돌아보며 쓴 글이었다. 나는 늘 주류에 진입할 수가 없었다. 능력 부족이 주요한 이유였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다. 학벌이 중요한 환경에 있어 본 적이 없어서 학벌에 콤플렉스를 느끼는 사람의 마음을 잘 몰랐다. 하지만 누가 좋은 학교를 나왔다고 하면 그 사람 이야기를 할 때 ‘그 학교 나왔잖아' 말하게 되는 걸 보면 나도 영향 아래 있는 게 분명하다. 처음에는 주류 사회와 내가 아주 조금 각도를 달리 한 것 같았지만 세월이 길어지니 꽤나 멀리 떨어져 있다. 세상이 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성큼성큼 변해가며 능력주의가 구석구석 영향을 끼치는 동안 나는 흐름을 전혀 못 타고 있었다. 책에서 교육제도의 변화과정을 제법 상세하게 설명해 주어서 꽤 많은 것에 ‘아하!’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모든 것을 평가 대상 삼는 학교가 되었다. 모든 것이 경쟁인 곳에서 아주 작은 실수도 용납할 수 없게 된 세대는 자연스럽게 보수화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기회의 공정에 왜 그렇게 목을 매게 되었는지 맥락을 보니 여혐과 일베가 설명이 되었다. 일부 급진적 페미니즘이 성평등한 세상이 아니라 능력=권력을 획득한 여성을 목적으로 삼는 마음을 짐작하게 되었다. 

 

길고 어려운 글도 잘 읽힐 수 있구나, 감탄하며 읽었다. 전반적으로 진단과 평가가 탁월해서 속이 시원해지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미래를 그리는 글에 ‘노동계급' ‘자본계급'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게 좀 어색한 느낌이다. 교육과정 안에 계급관점을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부 동의하고 유의미한 제안이지만 사상이라는 게 과연 과거로 흐를 수 있을까. 적어도 단어만큼은 새 옷을 입혀 주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p. 176~177 

점차로 좋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좋은 일자리에 들어갈 방법이 없어지면 노동자들은 시험에 매달리게 된다. 이미 학생 때부터 경쟁을 당연하게 겪으며 살아왔기에 오로지 시험을 통해서만 자신의 삶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청년 정규직이 ‘공공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공정하다고 믿어서가 아니다. 사회가 불공정하기 때문에 자신처럼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시험을 통해서만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매달리는 것이다. 이 시험마저 의미가 없어지면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 자진이 노력하고 고생한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격렬하게 반대하도록 만드는 요인이다.

능력주의가 유지되려면 경쟁이 필수적이다. 잘한 이들에겐 칭찬을 하거나 인센티브를 주고, 경쟁에서 뒤처진 이들을 격려하는 경쟁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노동에서의 경쟁은 잘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누려야 하는 보편적 권리를 마치 그들에게만 주는 것처럼 보장해 주고, 경쟁에서 뒤처진 이들은 생존 자체가 어렵도록 만든다.지금도 경쟁에서 뒤처진 이들은 불안정한 노동과 미래가 없는 노동에 시달린다. 지속적인 차별에 분노가 쌓이지만 이 사회는 그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기 때문에 그 분노는 사회적 분노로 발전하기 어렵다. 이런 경쟁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이 이 경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경쟁에서 뒤처지면 곧바로 생존이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p. 179

능력주의에서 벗어나 평등한 노동이 가능하려면,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이해가 분명해야 한다. 노동자의 권리는 보편적인 것이다. 안정적인 일자리에서 생활할 만한 임금을 받고 안전하게 일하고 휴식을 누리는 것, 자율성과 협력이 조화를 이루는 일터는 모든 노동자의 권리여야 한다. 경쟁에서 밀려나면 ‘인간다운 삶의 권리’나 ‘안정적인 노동의 권리’를 양도한다는 합의란 있을 수도 없다. 노동자의 권리는 헌법에 보장된 것이며, 어떤 논리로도, 어떤 근거로도 그 권리의 훼손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러하기에 기업과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여 추진하는 능력주의 정책에 순응할 의무도 없다. 능력주의는 ‘합리성을 가장한 차별’이며 ‘권리의 훼손’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p. 182

우리는 함께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경쟁이 아니라 협력의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 모든 노동은 연결되어 있다. 한 사업장의 업무는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의 노력과 소통을 통해서 완성되고 그 일의 결과로 목적을 달성한다. 사회에서의 평등이 일터에서의 평등을 만들고, 일터에서의 평등이 사회에서의 평등을 밀어 나갈 힘이라는 것을 믿고 연대하자. 노동자가 서로에게 경쟁 상대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우리 모두가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을 때 우리의 삶, 우리의 미래는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을 믿자. 함께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김혜진) 

 

p. 220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의 성품이라는 의미의 ‘캐릭터’에는 관심이 없다. 자질 중에는 기능적인 것만이 중요하다. 쓸모 있는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고, 구매력을 가졌는지가 중요하다. 가장 값나가는 것은 높은 구매력을 보증하는 부모의 문화 자본과 경제력에 기대어 획득한 경쟁 승리의 표시로서의 학업 성적이며, 학위와 자격증이다. 각광받는 분야는 의료, 법률, 경영 컨설팅, 금융으로 기능적인 것이 주를 이룬다. 

…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뜨는 만큼 자아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다. 암기 위주의 교육으로 생각하는 교육을 거의 하지 않는 한국에서 학생들이 사물과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집중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한국에서 교육 자본을 통해 사회 지배층에 오른 사람들 대부분은 인간을 이해하고 사회를 보는 눈뜨기에 있어서 올바른 생각, 풍요로우면서도 정교한 생각을 검증받은 게 아니다. 오히려 객관적 사실을 잘 숙지하고 있다는 점은 기존체제를 지키는 가치관과 이념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에 가깝다. (홍세화)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중간까지 읽다 포기했다면 사회과학 영역의 글로 당분간 돌아오지 못했을 것 같으니까.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과 관점으로 능력주의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유익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부에서 역사와 교육제도를 다루며 능력주의가 어떻게 뿌리내려왔는지 보여주었다면, 2부에서는 능력주의가 노동환경과 운동에 끼치는 영향, 의사가 쓴 의사들의 엘리트주의 비평, 페미니즘과의 연결을 통해 현재 사회에서 발현되는 능력주의를 실감할 수 있었다. 사회에 관한 공부가 왜 필요한지 절감하고 말았다. 세상에는 정말로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건 없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어쨌든 있기 마련이다. 단식 중인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치킨을 먹는 젊은 남성도, 공공의료에 반대하는 젊은 의사도, 머리 길이를 짧게 자르는 게 페미니즘이라 믿는 젊은 여성도, 그럴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옳고 그름, 찬성과 반대 이전에 역사와 사회적 배경을 공부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겠다. 

 

믿고 있는 근거를 바탕으로 선택도 하고 결정도 해야 살아갈 수 있지만, 내가 믿는 것이 고정값이라고 여기게 되는 순간이 위험하다. 공부란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게 드러나는 세계다. 그러니까 적어도 공부를 계속해 나간다면 고정된 ‘믿음’으로 누군가를 난도질하는 경우는 막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