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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9 [일본여행07] 달이 지구에 가려지던 날 영화 시간까지 한 시간쯤 남아서 갈만한 카페가 없을까 동네를 뱅뱅 돌았다. 아침부터 많이 걷고 말도 많이 해서 조금 쉬고 싶었지만 마음에 드는 카페가 보이지 않는다. 스타벅스라도 들어가 볼까 하다가 ‘커피 하우스’라는 간판의 2층에 눈길이 갔다. 한자로 적힌 이름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우리나라로 치자면 다방 같은 느낌이다. 용기 내서 한 번 들어가 보았더니 일본 영화에서 본 것만 같은 분위기가 펼쳐졌다. 카운터로 둘러싸인 주인장의 공간에 고운 할머니 한 분이 드립 커피를 내리고 있다. 할머니를 마주 보는 자리에는 유니폼을 입은 여자 손님, 곱게 차려입은 중년의 여성, 그리고 낡은 양복을 입고 노트북을 노려보며 담배를 피우고 앉은 깡마른 중년의 남성이 한 자리씩 띄우고 앉아 있었다. 머뭇거리며 들어가..
20221128 [일본여행06] 여행은 환대 수영장 친구와 수다를 떨던 중 친구가 ‘언니 여행 이야기 들으면 나도 뭔가 도전하고 싶어져요!’ 한다. 친구는 부산으로 이사 오기 전 교회에서 간사로 일하며 이런저런 해외 선교 활동을 다닌 적이 있단다. 내 여행이 마치 선교를 떠나서 현지인을 만나는 경험과 비슷해 보여서 신기하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나의 첫 해외 여행이 떠올랐다. 이스라엘 키부츠에서 두 달간 지내기 위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간 김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몇몇 지역을 여행하기도 했다. 손님을 환대하는 중동 문화권이 여행의 첫 경험이라 그런지 인간은 일단 여행자를 환대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동이 원활하지 않던 시대에는 여행자가 먼 곳의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첫 여행의 경험으로 인간에게는 이방인을 먹이고 재우고 ..
20221125 [일본여행05] 내가 되는 삶 다시 기차 안이다. 2주 전에는 일본이었고, 이번에는 부산에서 서울, 서울에서 강릉이다. (강릉에서 서울 가는 기차 안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주문진 고등학교 도서관 선생님이 ‘모든 시도는 따뜻할 수밖에’를 읽고 언젠가 한 번쯤은 학교의 아이들과 만나게 해 주고 싶으셨단다. 부르면 어디든 가는 동네 가수지만, 부산에서 강원도는 자주 갈 거리는 아니다. 운전해도 6시간 이상 걸린다고. 출근 날짜와 겹치기도 해서 한 번 고사했다가, 시간까지 변경해서 간곡하게 부탁해 오니 두 번 거절할 수는 없었다. 밤에 서울역에 도착해서 근처 숙소에서 하룻밤 묵고 새벽 6시 기차를 타고 강릉에 가 보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핑계 삼아 서울 사는 친구들 얼굴도 잠깐 볼 수 있을 테니. 서울에서 숙소를 잡아본 게 얼마 만..
20221124 [일본여행04] 하루가 길다 일본어 스터디에서 재밌는 일이 있었다. 보통 세 명이 짝을 이루어 30분씩 미리 주어진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주에 내가 좀 심하게 여행 이야기를 쏟아내 버려서 이번 주에는 좀 자제할 마음으로 갔는데, 어쩌다 보니 내 여행 이야기에 가장 크게 반응해 준 두 사람과 같은 그룹이 되었다. 더 듣고 싶다고 조르길래(?) 다시 한번 여행 자랑으로 흥이 오르던 중 한 명이 다음에 꼭 자기를 데리고 가 달라며 (디저트 뇌물까지 주면서)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랬더니 이미 여러 주제로 나와 대화를 나눠 본 다른 한 명이 “매일 만 보 이상 걸어야 하는데 괜찮겠어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완전히 간파당했군, 하면서 다 같이 깔깔 웃었다. 외국어 스터디이다 보니 여행에 관한 주제가 많았다. 질문에 대답하고 ..
20221123 [일본여행03] 자신감 충전 부산에서 후쿠오카까지의 비행시간이 너무 짧아서 (하늘에서 20분) 깜짝 놀랐다. 제주나 서울 갈 때보다 더 짧게 느껴졌다. 후쿠오카 공항 정보가 하나도 없었는데 탑승 직전에 우연히 보게 된 유튜브 클립에서 국제선에서 국내선까지 무료 셔틀버스가 있다는 걸 발견하고 그대로 따라 움직였다. 후쿠오카를 주로 다루는 유튜버가 공항을 소개하며 질문을 하나 던졌다. “후쿠오카의 가장 좋은 점은? 정답은 라면도 포장마차도 아니고… 공항에서 시내가 가깝다는 점!” 구글 지도로 검색해 보니 공항에서 숙소까지 걸어도 55분이었다. 몇 년 전 사 둔 오사카 지역 교통카드 ‘이코카’를 챙겨 갔는데, 그 사이에 전국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가 생겨 있었다. 공항에서 현금을 조금 충전해서 하타카와 텐진 중간쯤 있는 게스트하우..
20221122 [일본여행02] 마음의 지도 일주일에 세 번, 오전에 세 시간씩 대안학교에서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출근 전 학교 근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는 게 루틴이 되었다. 오랫동안 아침에 활동하지 않는 생활을 해 와서 카페인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뇌의 스위치가 켜 지지 않는다. 오늘도 어김없이 작은 잔에 담긴 진한 커피로 잠을 깨고 앉았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사람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꺅 소리를 지른다. 시선의 끝에는 빙글빙글 반짝반짝 산타와 루돌프를 태우고 돌아가는 회전목마 미니어쳐가 있다. 그들의 기척이 없었다면 크리스마스가 다 지날 때까지 나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으면 시각 정보가 저절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다. 어릴때 부터 쭉 그랬다. 그런 둔감..
20221121 [일본여행01] 봐 지금 피는, 꽃! 글을 쓰러 집 근처 카페에 왔다. 파란색 정사각형 테이블, 약간 푹신한 갈색 인조가죽 의자가 내 자리다. 눈앞에는 벽 하나를 가득 채우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다. 그 너머로 보이는 장면이 바다면 참 좋겠지만 몇 년 전 지어진 못생긴 아파트가 눈에 들어와 아쉽다. 카페 앞에 놓인 길은 산 한복판에 생긴 도로라서 ‘산복도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2차선 도로의 가로수는 대부분 벚나무다. 언제부터인가 봄의 벚꽃보다 가을의 벚나무 낙엽이 눈에 들어왔다. 낙엽을 대표하는 빨강, 노랑, 갈색의 빛깔을 모두 가지고 있어 가을을 더욱 가을로 만들어 준다. 무심코 바라본 커다란 창밖으로 벚나무 낙엽이 하나, 둘, 그리고 셋,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아래로 떨어졌다. 너무나도 가벼운 움직임이다. 화..
20240113 비와 공부 오랜만에 비가 가득 내렸다. 작은 집 창문들이 제각각 시끄러웠다. 덩달아 내 몸의 관절들도 시끄럽다. 내 몸이 내 것 같지 않다. 기분이란 날씨 하나에도 한 순간에 번할 수 있는 것. 기분에 따라 같은 일이 전혀 다르게 해석되곤 한다. 감정의 변화가 인간이라는 증거일테니 부정할 수는 없고, 대신 좀 가만히 지켜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언제든 틀릴 수 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생리 때문에 못 가던 수영장에 갔다. 선생님이 월차를 쓰셔서 자유수영이 되었다. 자유형 3바퀴, 자배평자 3바퀴 돌고 접영 웨이브 연습을 좀 했다. 코로나 이후로 몸이 좀 축나서 힘이 좀 없다. 그래도 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언제나 기분에 좋아진다. 기운은 없어서 좀 비실거리는 중이다. 누워있다가 동네 카페에 파는 레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