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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23

20230108 책 읽는 시간

리베카 솔닛의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을 꼼꼼하게 베껴 적으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었다. 그리고 다시 서문을 읽는데 전혀 다른 글처럼 읽힌다. 삐딱하게 바라보던 어떤 부분을 이제는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읽으면 읽을 수록 내가 알고 있던 좁디 좁은 세계가 드러난다. 요즘 나의 작업실이 되어 주는 동네 카페에서 사장님과 책 이야기를 잠깐 나누었다. 전에는 책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하루 종일 가게 일만 보고 있으니 읽을 시간이 없다고 했다. 오늘의 일정은 오랜만에 '나락서점'에 들러 보는 것이었다. 대표님이 책을 소개하는 방식을 인스타로 꾸준히 봐 왔는데, 막상 내가 책을 선택하고 소개하는 책방을 시작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보니 한결 더 대단해 보인다. 가는 길에 시장에서 귤을 조금 샀다. 책과 귤과 따뜻한 차의 조합이 겨울과 어울린다는 걸 어제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어제 만난 듯 즐거운 수다를 떨었다. 대표님이 인스타에 소개해 준 책, 소개하기 위해 지금 읽고 있는 책, 신세지고 있는 동네 카페에 선물하고 싶은 책, 그리고 와소랩 수제 비누를 샀다. 수영장에 가지고 다니는 와소랩 비누를 다 써서 온라인으로 구매할까 하다가 나락서점에 가면 살 수 있다는 걸 기억해냈기 때문에 참고 있던 중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책방을 열게 되었는데 점점 더 그 무게를 느끼고 있다고 했더니 갑자기 함께 살게 된 반려동물의 예를 들며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니겠냐고 하신다. 선배님의 묵직한 격려에 어쩐지 위로를 받았다. 나도 이제 '책임'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동네 정보에 밝은 대표님은 근처에 도자기 공방이 생겼다며 지도까지 펼쳐서 보여주셨다. 언젠가 독립출판물을 내고 책방에 입고한 적 있던 작가님이라는 말에 슬쩍 구경을 갔는데 오픈 기념 할인을 하고 있어서 예쁜 푸른색 접시 하나를 데려왔다. 사은품으로 작은 컵까지 챙겨 주셔서 가방이 묵직해졌다. 가게를 시작하시면서 여러 고충이 있으셨던 모양인지 책방을 시작한다는 말에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자영업......'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눈빛으로 응원을 주고 받은 후 밖으로 나왔다. 

 

비자림로 확장 공사에 반대하는 연대 요청에 부담만 가득 느끼던 중 책 속에서 리베카 솔닛이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반핵 시위를 했던 장면을 만났다.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나는 최악의 일을 다루는 방법은 그것을 직면하는 것임을 배웠다.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면, 그것이 당신을 뒤쫓는다. 그것을 무시하면, 무방비 상태일 때 그것이 당신을 덮친다. 그것을 직면해야만, 그 과정에서 동맹과 힘과 승리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문장이 따라왔다. 제안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와 상황을 물어 보았다. 첫 제안은 내 노래 '가만히 강정'을 활동가들과 합창으로 불러도 괜찮겠냐는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짧은 시간에 새 노래를 익혀 부르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노래를 선정했다. 대신 여러 예술가들의 연대로 활동가들에게 용기를 주는 포스팅을 매일 하나 씩 올릴 예정이라고 했다. '가만히 강정' 자리에 '비자림'을 넣어서 부르는 영상을 보내는 것으로 감히 연대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라도 괜찮다면 하겠다고 대답했다. 막막한 마음으로 고민만 하기보다 일단 전화를 걸어 보길 잘 한 것 같다. 책 속 문장이 나를 움직이게 해 주었고, '행동은 절망의 해독제'라는 존 바에즈의 말은 언제나 옳다. 

 

동네 카페 사장님에게 선물하려고 정세랑의 <피프피 피플>을 사서 읽다가 어쩐지 오랜만에 읽는 책으로는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요조의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을 다시 골랐다. 아직 안 읽어 본 책이라 후루룩 읽어 보았는데 내가 시와에게 알려준 마법의 코드를 시와가 요조에게 알려주는 장면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나는 그 코드를 오래 전 대전의 나츠에게 배웠다. 기타 코드가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고 그게 시와의 노래 '완벽한 사랑'이 되고 요조의 책에도 실리다니 엄청 신기하고 반가웠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면서 책방을 운영하고 책을 쓰는 요조는 어쩌면 나의 롤모델일지도 모르겠다. 섬세하고 솔직한 문장들 속에서 잘 쉬기도 하고 내 다음 챕터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책방을 준비한다고 하면서 책만 읽고 있다. 심지어 베껴 쓰며 시간을 비효율적으로 쓰는 중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이 시간이 참 좋아서 별로 조바심이 나지 않는다. 이 좋은 걸 왜 잊고 살았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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