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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22

20221205 [일본여행11] 섬과 자전거

초록색 자전거를 빌렸다. 7개의 다리를 다 건널 생각은 없어서 전기자전거가 아닌 일반자전거를 5시간 이용하는 저렴한 코스를 선택했다. 지도를 받고 조금 복잡해 보이는 경로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으니 잘 찾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슬금슬금… 바닥에 그려진 파란색 라인만 놓치지 않고 가면 된다고 했다. 자전거를 배에 싣고 10분이면 눈앞에 보이는 섬에 도착한다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었다. 오랜만에 타 본 자전거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대면서 코앞에 있는 항구까지 가는데 자전거 가게 아저씨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뒤통수에 느껴졌다. 아무튼, 출발이다. 

 

자전거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몇 년 전 타이베이에 놀러갔을 때 대만 친구 루루와 이바가 꼭 자전거를 타야 한다고 해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막상 자전거로 해 질 녘 강가를 씽씽 달리자 “행복하다!”는 말이 저절로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 순간 이후로 자전거를 탈 기회가 생기면 적극적인 마음으로 페달을 밟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난봄 우도에 있는 밤수지맨드라미 책방에서 갑자기 자전거를 빌려준다고 했을 때 바다를 따라 좋아서 실실거리며 섬을 돌아다니지 못했을 거다. 오노미치에서 자전거를 탈 생각도 절대 하지 않았을 거고. (루루 이바 고마워!) 섬과 자전거는 행복의 조합이다. 

 

처음에 낯선 길을 혼자 달리고 있으니 긴장감으로 손에 땀이 났다. 낯선 자전거와 시골 섬의 분위기에 조금씩 적응이 되기 시작하자 주변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힘껏 나를 환영하는 것만 같다. 주위는 온통 귤밭과 농부들과 익숙한 듯 낯선 나무들로 가득하다. 일본 시골에 꼭 가 보고 싶었는데 모르는 사이에 시골길을 자전거로 달리고 있다. 마을 길에 조금 익숙해질 무렵 바닷길에 닿았다. 낚시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앉아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작은 섬의 바다는 아직 사람의 손에 훼손이 덜 되어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행복에 그닥 집착하지 않는 편인데 이상하게 자전거를 타고 자연 속을 달리면 언제나 ‘행복’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게 신기하다. 특별히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니까 언제든 멈추어서 맛있는 공기를 맛보거나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길 반복했다. 조금 외로워진 이유는 이렇게 좋은 순간을 누군가와 나눌 수 없다는 게 아쉬워서다. 대신 인스타에 올릴 사진을 잔뜩 찍었다. 

 

두 번째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에 다다르기 전에 바다를 마당 삼은 가게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모르고 지나갈 정도로 작은 오두막이 카페라는 걸 알아차린 건 야외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할아버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완벽한 오전에 나에게 딱 하나 부족한 게 커피였으니 일단 멈출 수밖에. 따뜻한 커피를 기다리면서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와 영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이름은 유우상, 매일 자전거로 80킬로미터를 달리는 루틴을 가진 80대 할아버지다. 물론 ‘70 cafe’에 들르는 것도 빼먹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는 태국에서 일했다면서 그림 같은 글자가 그려진 명함을 보여주며 ‘사와디캅’ 하고 개구쟁이 표정으로 웃었다. 카페 주인장인 유코상이 대화에 합류하면서 내가 일본어 쓰러 일본에 왔다고 하니까 유우상이 ‘그럼 일본어로 이야기해야겠네’ 하신다. 세대도 국적도 다른 사람들이 우연히 작은 섬의 카페 앞마당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나보다 일본어 잘하는 것 같은데’ 라는 말을 남기고 유우상은 멋진 헬멧을 쓰고 남은 라이딩을 위해 자리를 떴다. 저녁에 밥 사주겠다고도 하셨는데 왠지 저녁에 오노미치에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일단 거절해 두었다. (예감은 적중했고!) 하지만 여행자를 위해 열린 마음만은 고맙게 받았다. 

 

유코상과는 알고 보니 동갑이다. 젊은 시절 일하고 여행하고를 반복하며 지내던 서핑과 스노보드를 좋아하는 멋진 친구였다. 남편의 고향에 돌아와 바다 풍경에 반해 이곳에 집을 지은 게 8년 전, 카페를 시작한 건 4년 전이란다. 집까지 짓고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만 내년에는 다른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꿈꾸듯 말하는 자유로움을 마음속에서 지우지 않았다. 여행자로 살아온 시간이 길었기 때문인지 대화가 너무나 즐겁다. 여기까지 왔으니 다리 하나는 건너봐야 할 것 같아서 돌아오는 길에 오겠다고 인사하고 다시 자전거를 탔다. 다리까지 가는 좁은 언덕길은 차와 함께 달리던 길 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한창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나무들과 파란 하늘과 새들의 노랫소리에 오르막길이 그리 힘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커다란 교각의 위는 자동차가 달리고 그 아래 좁은 통로는 걷거나 바퀴가 두 개인 것만 지나다닐 수 있다. 바다 위를 자전거로 달린다는 신기한 마음은 있었지만 철저한 안전 가림막이 시야를 가리는 건 아쉬웠다. 다음 섬에 도착해서 바다를 바라보고 잠깐 쉬다가 곧 되돌아왔다. 유코상의 카페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다. 오르막이었던 길이 시원한 내리막이 되는 것도 자전거의 묘미다. 

 

벌써 두 번 왔으니 이내상은 이미 단골이 되었네, 유코상이 반갑게 맞아준다. 토스트와 커피를 주문해서 허기도 함께 달래보기로 했다. 가방에 있던 오노미치에서 산 빵을 유코상에게 선물로 내밀었다. 아침에 욕심부려 많이 사 두길 잘했다. 카페 마당에서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또래 친구와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의 꿈을 이야기하다 보니 단골손님들이 하나 둘 찾아와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떠나갔다. 유코상의 다정함이 이곳을 사랑방으로 만드는구나 느낄 수 있었다. 자전거 여행을 하던 70대 할아버지가 나처럼 우연히 들러 차를 마시고 길을 물었다. 내가 오늘 가길 포기한 길을 반대편에서부터 달려온 참이었다. 자신은 도쿄 근방에서 왔는데 일본 전국을 자전거로 자주 다녀 보았지만 ‘여기가 젤 좋아’라고 말한다. 우리 동네도 아닌데 괜히 기분이 좋았다. 친구도 생기도 단골 카페도 생긴 곳이니까 기뻐해도 괜찮겠지. 다음에 언젠가 다시 찾아왔을 때 유코상이 있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생각하면서, 혹시 어디론가 떠났다고 해도 우연히 만난 오늘의 시간이 꿈처럼 느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노미치를 향해 되돌아 나오는 길은 갈 때보다 훨씬 짧게 느껴졌다. 단골 가게와 친구가 생긴 예쁜 작은 섬과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졌기 때문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