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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22

20221129 [일본여행07] 달이 지구에 가려지던 날

영화 시간까지 한 시간쯤 남아서 갈만한 카페가 없을까 동네를 뱅뱅 돌았다. 아침부터 많이 걷고 말도 많이 해서 조금 쉬고 싶었지만 마음에 드는 카페가 보이지 않는다. 스타벅스라도 들어가 볼까 하다가 ‘커피 하우스’라는 간판의 2층에 눈길이 갔다. 한자로 적힌 이름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우리나라로 치자면 다방 같은 느낌이다. 용기 내서 한 번 들어가 보았더니 일본 영화에서 본 것만 같은 분위기가 펼쳐졌다. 카운터로 둘러싸인 주인장의 공간에 고운 할머니 한 분이 드립 커피를 내리고 있다. 할머니를 마주 보는 자리에는 유니폼을 입은 여자 손님, 곱게 차려입은 중년의 여성, 그리고 낡은 양복을 입고 노트북을 노려보며 담배를 피우고 앉은 깡마른 중년의 남성이 한 자리씩 띄우고 앉아 있었다. 머뭇거리며 들어가서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커피를 주문하고 나서 조금 배가 고픈 것 같아 토스트도 주문했더니 ‘그럼 세트로!’ 할머니가 찡긋 웃으며 말했다. (세트가 200엔 더 저렴하다)

 

오후 4시에 커피 하우스에 앉은 사람들을 힐끔거리며 캐릭터의 사연을 상상해 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면 창문 가득 가로수의 나뭇잎이 가득하다. 창에 쓰인 카페 이름이 궁금해서 커피를 내어줄 때 물어보았다. 나무 ‘수’를 두 번 써서 樹樹라고 쓰고 ‘쥬쥬’라고 발음한단다. 창문 밖에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이 유리창에 당당하게 이름표를 붙이고 있는 것 같아 귀여웠다. 카페는 나무들과 함께 그 자리에 40년 동안 쭉 있어 왔다고 한다. 잘생긴 한국 신사들이 종종 찾아와서 기쁘다고 말하며 웃으시는 할머니의 얼굴에 퍼지는 주름이 참 예뻤다. 커피를 마시고 일기를 조금 쓰며 쉬고 있으니 여러 가지 과일에 요거트와 꿀을 살짝 얹은 접시를 서비스라며 가져다주셨다. ‘우리 집에는 단골손님이 주로 온답니다’라는 말을 듣기 전부터 또 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더랬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해는 이미 지고 캄캄한 도시의 저녁과 개기월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게 재밌다. 전날 들렀던 숙소 근처 이자카야에 다시 가서 이번에는 오차즈케 큰 사이즈를 시켜 먹었다. 주방장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운 직원들이어서 이번에는 조용히 밥만 먹고 나왔다. 숙소 앞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캐리어 두 개를 끌고 땀을 뻘뻘 흘리는 여행자 하나가 들어온다. “大丈夫? 괜찮아요?” 하고 물었더니 “Can you speak English? 영어 돼요?”라는 대답에 영어로 한참 이야기하다 보니 웬걸, 한국 사람이다. 숙소 찾아오는 데 길을 1시간도 넘게 헤맸다고 한다. 나에게도 일본어 전혀 모를 때 일본 여행하러 와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주변이 온통 모르는 글자들로 가득한데 시스템은 너무 구체적이어서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고생해 도착한 숙소에서 한국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던 모양인지 선뜻 맥주를 대접하겠단다. 미국에 정착해 20년째 살고 있다는 H는 알고 보니 동갑내기라서 서로 놀랐다. 여행 다니며 40대 또래를 (게다가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날 일은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었던 이자카야 ‘아키라’에 그를 데리고 또 한 번 들렀으니, 여긴 단골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세계 각국 젊은이들의 마음에 여행을 떠나면 로맨스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강렬한 희망을 심어주었고, 그만큼의 처절한 실망을 안겨주었다. (세상 아름답던 로맨스도 결국 현실이 되면 다른 모양으로 변신한다는 것 역시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으로 보여주었다) 게스트하우스로 들어오는 H를 언뜻 보고 조금 멋있다고 생각했다. 당황한 상황에서 발견한 낯선 한국 사람에게 한껏 의지하는 모습이 강아지 같아서 귀엽기도 했다. 같이 맥주를 마시고 골목을 조금 걸었다. 조금 오른 취기에 웃으며 팔을 조금 친다든지, 매력 있다고 슬쩍 말해주는 걸 은근히 즐기기도 했다. 이성과 단둘이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게 5년 만이던가 6년 만이던가, 기억이 아득하다. 

 

그런데…. 그는 말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말이 많아도 내용이 알차고 재밌으면 오히려 장점이 되기도 한다. 내가 모르는 흥미로운 이야기라면 밤을 새우면서까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인생사와 취미와 가족관계와 친구들의 취향과 남은 여행 계획까지 두서없는 정보들을 쏟아냈다. 뭐 좋다. 여기까지는 참 솔직한 사람이구나, 나도 두서없이 투명하게 누구에게나 이야기하는 편이니까 이해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가 전.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질문을 던지고도 대답에는 관심이 하나도 없다. 쏟아지는 말 사이를 닌자처럼 끼어들어 보려고 노력을 좀 하다가 곧 포기했다. 내일 새로운 여행지에서 쓸 체력을 남겨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여행지에 로맨스는 없었다. 이제껏 수많은 여행 중 남자와 얽힌 기억은 대체로 끔찍했다. (H는 오히려 양호한 편이었다) 어딜 가나 인복은 자신하는데 남자 보는 눈은 꽝인 나란 사람에게 성장은 없는 것인가. 닫힌 관계에 헌신할 준비가 전혀 안 된 태생적 이방인에게 로맨스는 과분한 영역일지도. 몽글몽글한 기분은 BL 드라마로 충당하기로 하고 짐을 챙겨서 다음 여행지를 향하는 걸로. H가 사준 맥주를 모닝커피 한 잔으로 갚으며 친구 먹기로 했다. (기회가 되면 좀 들으라는 조언을 해 주고 싶군) 어쩌다 보니 미국에 사는 동갑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후쿠오카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