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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22

20221130 [일본여행08] 인생 첫 신칸센

일찌감치 하카타역에 도착해 오벤토(도시락) 가게를 기웃거렸다. 일본에서는 기차에서 꼭 벤토를 먹어야만 할 것 이미지가 있다. 에키벤(역도시락)이라는 단어가 따로 있고, 기차에서 도시락 먹는 이야기만으로 드라마가 만들어질 정도니까. 배가 별로 고프지 않기도 하고 고기가 대부분 들어가 있어서 그냥 포기할까 하다가 그래도 첫 신칸센 경험인데 싶어 생선이 들어간 작은 사이즈의 벤토를 골라 기차를 탔다. 히로시마까지는 1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서 타서 도시락 까먹고 약간 멍때리다 보니 금방 도착했다. 숙소와 기운이 잘 안 맞았던 모양인지 잠을 계속 설쳐서 처음으로 탄 기차에 별 감흥이 없다. 여행을 충분히 즐기려면 체력이 꼭 필요하다. (혹은 젊음이거나) 

 

히로시마에서 가려고 했던 식당은 휴무일이다. 배도 별로 고프지 않고 걸어 다닐 힘도 없었는데 일단은 밖으로 나와 보니 투어버스 정류장이 눈에 들어왔다. 역에서 출발해 시내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역으로 돌아오는 순환버스다. 마침 정류장으로 들어오는 버스에 올라 혹시나 해서 레일패스를 보여주니 그걸로 탈 수 있다고 한다. ‘역시 운이 좋군!’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원폭 기념관, 평화 공원을 지나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버스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개 방송에 귀를 쫑긋 세우고 창밖만 이쪽저쪽 바라보았다. 아직 가을 잎은 절정에 이르지 못했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이 지역은 단풍이 자랑거리인지 지역 은행 이름이 ‘もみじ銀行 단풍잎 은행’이다. 걷는 속도로 여행하지 못하고 경유지로 남은 히로시마였지만, 도시 전체가 평화에 대한 의지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이다. 비극을 덮고 지우는 게 아니라 제대로 마주하고 기억하는 것이 평화에 가까운 길이라고 가만히 보여준다. 비극을 덮으려고만 애쓰는 지난 한 달간의 한국 정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버스에서 내려 아무 신칸센이나 골라 타고 후쿠야마까지 갔다. 목적지인 오노미치로 가기 위한 일반 열차를 갈아탈 수 있는 곳이다. 출발할 때는 짐도 많고 수면 부족이 계속 따라다녀서 환승만 할 생각이었다. 역에 내리자마자 창밖으로 바로 보이는 후쿠야마 성의 우아한 자태에 이끌려 코인 락커에 짐을 맡기고 조금 걸어보기로 했다. 막상 가까이 가니까 멀리서 보는 게 더 아름다운 것 같았지만. 아마도 자세히 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겠지. 역사 좋아하는 우리 엄마는 시간 가는 줄 몰랐을 장소였다. 도시에서 점점 규모가 작아지는 곳으로 옮겨가고 있다. 특별히 계획한 건 아니지만. 역 주위를 배회하는데 사람도 없고 가게도 없고 햇살이 따뜻한데도 스산한 기운이 맴돈다. 잠깐 쉬어가자 싶어 아무도 없는 작은 커피 하우스에 들어갔다. 주인 할머니 한 분이 드라마를 보고 계셨다. 이번에도 커피와 토스트를 주문했고 잠깐 말을 걸어 보았는데 처음에는 조금 경계하는 느낌이 들었다. 조심스레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토스트 만드는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주며 가게를 45년째 해 오고 있다는 자부심을 보여 주신다. 사이폰 방식으로 내린 커피에서도 묵직한 긍지의 맛이 났다. 나오는 길에 보니 입구 열 오래된 나무 현판에 멋진 글씨체로 ‘香り高い珈琲 향이 뛰어난 커피’라고 쓰여 있다. 

 

작은 역에 다 들르는 열차를 20분쯤 타고 오노미치에 내렸다. 후쿠야마보다 더 작은 동네였지만 내리자마자 활기찬 에너지가 느껴졌다. 오후 햇살이 부드럽게 비치는 상점가에 교복 입은 무리가 자전거를 타거나 삼삼오오 걸어 다니고 있으니 일본 청춘 영화 속을 걷는 것 같다. 역에서 숙소인 yado 게스트하우스는 걸어서 5분 거리다. 4시 체크인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하니 선하고 밝은 얼굴의 여자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히로짱의 부인인 타마짱은 일주일에 하루만 체크인 업무를 하고 있었다. 마침 그날 도착해 타마짱을 먼저 만날 수 있었던 걸 돌아보면 나의 여행 운을 다시금 실감하게 한다. 과거의 내가 나도 모르게 개인실을 예약해 둔 걸 칭찬했다. 3층짜리 오래된 목조 건물을 아늑하게 고쳐서 들어가자마자 오늘은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 방 창밖으로 깨끗한 거리와 바다와 맞은편의 섬이 보인다. 그 섬이 이름마저도 ‘向島 (무카이지마) 맞은편 섬’이라는 사실은 다음날 자전거를 타며 알게 되었다. 

 

오노미치에 가득한 활기는 크지 않은 마을임에도 7개의 섬을 잇는 자전거 길의 출발지로 관광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 마을의 에너지는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사람은 재화를 만들 산업이 있어야 모여든다. 후쿠시마 3.11 대지진 이후 도시를 떠나 지방으로 옮겨가는 젊은이들이 늘었다고 한다. 고령화 이후 일본 각지에 빈집이 늘고 있다지만, 젊은이들이 그곳을 채우려면 무언가 먹고 살 거리가 필요할 거다. 오노미치에 관광 자원이 충분하다는 사실이 도시재생의 자원으로도 이어졌을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된 또 하나 중요한 자원은 원주민의 개방성이었다. 오노미치는 역사적으로 히로시마 원폭이나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많이 정착했기 때문에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 적다고 한다. 도시재생에 대한 다큐를 보고 오노미치에 왔고 일본어를 왕창 쓰는 게 여행의 목표라는 이야기를 하니 타마짱이 누군가의 하우스 파티에 저녁 먹으러 같이 가자고 (초대한 사람에게 묻지도 않고) 했다. 이방인을 경계하지 않는 마을 사람다운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