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미치에 도착한 날, 제주도로 이주한 친구가 석양을 매일 볼 수 있는 바닷가 마을에 살아서 행복하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저녁 초대를 받고 편의점에서 맥주라도 사서 가려고 바다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걸었다. 코발트색과 오렌지색의 그라데이션이 끝내주는 하늘과 바다가 산책 메이트였다. 에비스 캔맥주와 한국 김 맛(?) 감자칩을 골라서 타마짱의 퇴근을 기다렸다. 게스트하우스 yado는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이기도 한가 보다. 누군가 갑자기 뛰어와 화장실을 빌려 쓰고 ‘공유 주방’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의 사무실 소파에 털썩 앉아서 타마짱에게 실연 소식을 전했다. 남자친구가 갑자기 이별을 고해서 이유를 끈질기게 물었더니 ‘손에 닿는 피부의 감촉이 맞지 않아서’라고 했단다. 다른 이유가 있는데 변명을 한 게 아닐까 추측해 보았지만, 충분히 대화를 해 본 결과 그게 진짜 이유였다고 한다. 연애, 몰까… 타마짱과 내가 흥분하며 화내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 그녀는 주위 사람들의 그런 반응을 모으며 실연의 아픔을 이겨내는 중이라고 했다. 한국에도 이 이야기를 전해서 더 욕을 퍼트라자는 타마짱의 농담에 다 같이 웃었다.
오노미치역 근처의 상점가는 평지에 있지만, 길 건너편 마을은 산 중턱에 집들이 가득하다. 자동차로 갈 수 없는 좁은 길들이 모세혈관처럼 뻗어 있다. 부산의 우리 동네와 무척 닮아있어 친근하고 마음 편했다. 절 하나를 통과해야 마을로 진입할 수 있는 게 재밌다. 전혀 가게가 없을 것 같은 골목을 가리키며 저기에 작은 카페나 (일본에서 가장 작을 거라는) 빵집이 있다는 등 타마짱의 안내를 따라 밤길을 즐겁게 걸었다. 도착한 곳은 1년째 빈집을 고치고 있는 중이라는 유우상의 집. 아직 완성은 아니지만 (2층이 남았다며 오노미치의 사그라다 파말리아라고 말했다) 그동안 도움을 준 동네 친구들을 초대해 1층 거실에서 작은 축하 파티를 여는 자리였다. 카레나 후무스를 만들어 온 사람, 커다란 생선을 들고 온 사람, 오니기리를 만들어 온 사람, 칵테일 만드는 도구와 술을 를 준비해 온 사람 등등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있었다. 조금 어색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인사를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한 친구가 직접 유기농으로 농사짓고 그날 도정한 쌀을 들고 와서 밥을 지었는데 한 숟갈 입에 넣으니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 모든 긴장이 사르르 풀렸다.
일대일 대화까지는 무리가 없었는데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쏟아내는 일본어를 좇아가는 건 좀 어려웠다. 하지만 모두 한국에서 온 이방인에게 관심을 듬뿍 주는 친절한 사람들이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특히 한국 사람을 처음 본다는 히로짱과 타마짱의 두 초등학생 아들, 에이짱과 린짱의 질문 덕분에 파티의 낙오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실은 파티 같은 자리에는 좀 취약한 편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단어를 한국어로 뭐라고 하냐고 계속 물어서 잠깐 한국어 교실이 되기도 했다. 나중에는 한국과 일본의 외교 문제까지 질문이 확장되어 땀을 조금 흘렸지만, ‘가까운 나라니까 친하게 지내는 게 좋겠다’는 에이짱의 깔끔한 정리 덕분에 어려운 주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오스트리아, 독일, 뉴질랜드에서 온 친구들도 있는 (어쩌다 보니) 국제적인 파티였는데 모두 일본어로 이야기한다는 게 신선했다. 그날 모인 젊은 오노미치 이주자들이 대부분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책을 만들거나 DJ를 하거나 글을 쓰거나 농사를 짓거나 커뮤니티 활동가라는 사실은 나중에 인스타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한 명 한 명 제대로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는 게 지금 돌아보니 아쉽다. 집중을 오래 해서 정신이 조금 혼미해질 무렵 아이들이 자러 가야 하는 시간이라는 말에 나도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낯선 사람에게 아무 경계 없이 따뜻한 음식과 관심을 준 게 고마워서 가기 전에 거기 마침 놓여있던 클래식 기타로 노래를 부르겠다고 해 버렸다. 유우상이 친절하게 튜닝을 해 주고 어딘가에서 카포도 찾아서 들고나왔다. 일본인 대부분이 알고 있는 (심지어 아이들도 알고 있었다) 미야자와 겐지의 ‘비에도 지지 않고’를 먼저 부르고, 유일하게 일본어로 만든 노래 ‘까만 바다’를 이어 불렀다. 처음 본 사람이 부르는 처음 듣는 노래에 모두가 귀를 기울여 주고 크게 박수를 쳐 주었다. 그 밤의 온기를 떠올리면 지금도 행복한 꿈을 꾼 기분이다. 사진 한 장 찍지 못한 걸 아쉬워했는데 히로짱이 찍어 둔 영상 속에 그 밤의 반짝임이 남아 있어 다행이다.
혼자서 밤길을 되돌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타마짱이 알려준 가게들의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조용한 골목과 마음에 쏙 드는 오노미치의 상점가를 음미하려고 평소보다 천천히 걸었다. 2층 내 방에는 두꺼운 자주색 이불과 커다란 고릴라 동상과 은은한 조명과 창밖 밤바다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떠났지만 절대 혼자가 되지 않는 여행이 계속되고 있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일기를 쓰고 며칠 만에 처음으로 깊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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