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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22

20221124 [일본여행04] 하루가 길다

일본어 스터디에서 재밌는 일이 있었다. 보통 세 명이 짝을 이루어 30분씩 미리 주어진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주에 내가 좀 심하게 여행 이야기를 쏟아내 버려서 이번 주에는 좀 자제할 마음으로 갔는데, 어쩌다 보니 내 여행 이야기에 가장 크게 반응해 준 두 사람과 같은 그룹이 되었다. 더 듣고 싶다고 조르길래(?) 다시 한번 여행 자랑으로 흥이 오르던 중 한 명이 다음에 꼭 자기를 데리고 가 달라며 (디저트 뇌물까지 주면서)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랬더니 이미 여러 주제로 나와 대화를 나눠 본 다른 한 명이 “매일 만 보 이상 걸어야 하는데 괜찮겠어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완전히 간파당했군, 하면서 다 같이 깔깔 웃었다. 외국어 스터디이다 보니 여행에 관한 주제가 많았다. 질문에 대답하고 다른 사람들의 여행 방식을 들으면서 내가 어떤 여행을 좋아하는지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낯선 곳에서 누군가의 생활이 한껏 묻어나는 골목을 발로 충분히 걷고, 그 위에서 다채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득 듣기 원하는 여행자다. 

 

밤에 걷는 골목을 특히 좋아한다. 후쿠오카 숙소 주변 동네는 적당히 밝고 적당히 어두워서 밤에 걷기 좋았다. 낡은 분위기의 소바 정식 가게에 관심이 가서 내일 꼭 가보겠다고 일기장에 적어 두었는데, 딱 내가 여행하는 기간을 포함한 긴 휴가 중이었다. 후쿠오카에서 전부터 가 보고 싶었던 독립서점 북스큐브릭도 정기 휴일이다. 이번 여행은 계획 따위는 절대 세우지 말라는 듯이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추천받은 히로시마 식당도, 오노미치에 밤에만 여는 책방과 또 다른 작은 책방도 내가 가려고만 하면 죄다 휴일이었다. 하지만 전혀 실망할 필요가 없다. 우연은 걷다 보면 어디서든 주울 수 있다. 

 

후쿠오카 비건 식당을 검색해 보니 sonusonu라는 가게가 있다. 그 밖에 검색에 나온 곳들은 샐러드 가게이거나 비건 옵션이 있는 곳들 같아서 (검색 실력이 많이 모자람) 일단 거길 가보기로 했다. 아침 8시부터 영업을 시작하고 숙소에서 걸으면 20분쯤 걸린다고 나오길래 아침 산책을 나섰다. 어제는 퇴근길의 사람들, 오늘은 출근길의 사람들과 마주친다. 사회의 바퀴를 열심히 굴리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응원과 감사 인사를 한다. 겨울의 해 질 녘 햇살만큼 아침 햇살도 좋아한다. 후쿠오카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과 천이 있어서 걸을 맛이 났다. 사람 사는 곳에는 쉼표가 되는 물길이 꼭 있어야 한다. 천변을 걸으며 아침부터 까만 새, 하얀 새들을 잔뜩 만났다. 걔네들이 먹다 남긴 홍시가 여기저기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게 귀여웠다. sonusonu에 도착해서 보니 인기척은 있는데 아직 오픈한 느낌이 아니다. 어라, 지도에 나온 정보와 다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조금 더 낯선 동네 산책을 해 보기로 했다. 

 

배가 고파서 일단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토스트와 커피를 시켰다. 출근 전 잠깐 들러 아침을 먹는 정장 입은 사람들이 많다. 성실한 사람들 속 일원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9시가 가까워지니 하나둘 자리를 떠났지만. 간단한 아침은 해결했으니 비건 식당은 점심때 가기로 하고, 하카타역에 레일패스 예약권을 표로 교환하러 갔다. 하루 일찍 가는 게 좋을 거라는 일본어 선생님의 조언을 따르길 잘했다. 일본의 기차역 티켓 창구에는 언제나 긴 줄이 있어 대기 시간이 길었다. 한참을 기다려 표를 받고 다시 하카타, 나카스, 텐진 사이를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녔다. 절과 신사가 정말 많았는데 규모와 스타일이 각양각색이다. 호텔처럼 모던한 곳부터 궁궐처럼 전통적이고 화려한 곳까지 눈요기가 충분하다. 뭐니 뭐니 해도 젤 재밌는 건 사람 구경이다. 다리 밑에서 배를 타고 강을 청소하는 아저씨들, 화단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이끼 같은 생물을 꼼꼼하게 정리하는 할아버지, 누가 봐도 관광객, 잔뜩 멋을 부린 힙스터들, 거리에서 비질하는 스님까지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비비언 고닉의 책 제목)를 떠올리게 된다. 누군가의 눈에는 무작정 도시를 걷는 내가 외로운 방랑자로 보이려나. 

 

점심을 먹으러 다시 비건 식당에 갔다. 손님은 없었지만 입간판이 밖에 나와 있길래 용기 내서 들어가 보았다. 각 테이블에 주문 페이지로 연결되는 큐알코드가 있는 엄청 현대적인 곳이었다. 말 걸 틈이 없네, 아쉬워하며 비건 피자 한 조각과 오렌지 주스를 시켰다. 눈앞에 오렌지 주스를 만드는 기계가 보였고 점원은 원하면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다며 오렌지 몇 개를 내 손에 쥐여줬다. 오락실 농구 게임기처럼 위에 있는 구멍에 오렌지를 넣으면 아래로 과즙이 떨어지는 방식이었는데, 내가 하나씩 공처럼 넣으니 예쁜 점원이 옆에 서서 ‘옳지, 옳지’ 느낌으로 응원을 해 준다. 그 상황이 너무 귀엽고 웃겼다. 

 

손님도 나밖에 없고 피자는 오븐에서 시간이 꽤 걸리는 음식이니까 쉐프에게도 말을 걸어볼까 싶었다. ‘비건 햄버거를 테이크아웃해서 가면 언제까지 먹을 수 있나요?’ (좋아, 자연스러웠어) 대화가 이어지고 내가 한국에서 온 여행자라고 하니까 자기도 이번 달 말에 서울에 여행 갈 계획이라고 반가워했다. 나는 서울 비건 식당 ‘다켄시엘’ 추천해 주었고, 내가 히로시마로 간다고 하니까 친형이 살아서 종종 간다며 비건 옵션이 있는 오코노미야키 가게를 추천해 주었다. 비건 피자 맛있게 먹고 셋이서 신나게 수다 떨고 셀카도 찍고 또 만나자고 인사했다. 나와서 보니 원래 알고 있던 친구들이랑 만나서 가볍게 놀다가 헤어진 것 같은 기분이다. 일본어 실컷 쓰기는 목표가 낮은 미션이었나 보다. 그야 여기는 모두가 일본어를 쓰는 일본이잖아! 아침부터 움직였더니 하루가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오늘의 남은 우연을 찾아 다시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