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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22

20221121 [일본여행01] 봐 지금 피는, 꽃!

글을 쓰러 집 근처 카페에 왔다. 파란색 정사각형 테이블, 약간 푹신한 갈색 인조가죽 의자가 내 자리다. 눈앞에는 벽 하나를 가득 채우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다. 그 너머로 보이는 장면이 바다면 참 좋겠지만 몇 년 전 지어진 못생긴 아파트가 눈에 들어와 아쉽다. 카페 앞에 놓인 길은 산 한복판에 생긴 도로라서 ‘산복도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2차선 도로의 가로수는 대부분 벚나무다. 언제부터인가 봄의 벚꽃보다 가을의 벚나무 낙엽이 눈에 들어왔다. 낙엽을 대표하는 빨강, 노랑, 갈색의 빛깔을 모두 가지고 있어 가을을 더욱 가을로 만들어 준다. 무심코 바라본 커다란 창밖으로 벚나무 낙엽이 하나, 둘, 그리고 셋,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아래로 떨어졌다. 너무나도 가벼운 움직임이다. 화려한 연분홍 꽃과 무성했던 잎의 푸르른 기억에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이. 멋대로 자연에 인간을 비유하는 오만함을 부끄럽게 느끼면서도 네모난 유리창에는 그런 가뿐한 태도로 살고 싶은 내 마음이 비치는 중이다. 

 

일주일 동안의 짧은 여행의 기억을 글로 남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돌아와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가만히 돌아보는 그때는 가을에 떠올리는 봄꽃처럼 아득하다. 내 이름 ‘이내’는 일본어로 ‘벼’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름을 말하고 ‘쌀’이 되는 ‘벼’라고 설명하면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쌀밥을 제일 좋아해요’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아빠가 몇 년 전부터 쌀농사를 짓게 되면서 알게 된 게 하나 있다. 벼의 꽃은 일 년 중 어느 하루, 단 두 시간 피었다 진다는 사실이다. 벼꽃을 보았다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보이지 않는다고 나를 사랑하는지 묻진 말아요…”라고 시작하는 루시드폴의 ‘벼꽃’이 무슨 의미인지 10여 년 전에는 전혀 모르면서 노래를 들었다. 작고 하얀 벼꽃을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얼마 전 아빠의 햅쌀이 집에 도착했다. 뚝배기에 밥을 지어 맛있게 먹었다. 김과 장아찌는 조연일 뿐 주인공은 한해의 날씨와 땀을 가득 품은 하얀 쌀밥 한 공기다. 

 

짧고도 강렬했던 꽃의 시간이 멀어지고 있다. 그렇게 길게 느껴졌는데 여행은 고작 일주일이었다. 끄집어내 글로 쓰는 게 무슨 의미람, 이미 인스타에 실컷 실시간으로 올렸는 걸, 이런 마음이 점점 더 힘을 얻는 중이다. 40대에 일본어 공부를 시작한 것도, 일본어를 일본에서 써 보기 위해 혼자 떠난 여행도, 그 시간을 글로 좀 더 들여다보려는 결심도 모두 모험이다. 알 수 없는 미래의 사건으로 자신을 던져넣기 위해서는 어떤 에너지가 필요하다. 좋아하는 마음, 삶에 대한 믿음, 좀 더 나아지고 싶은 열망, 현재에 느끼는 부족함, 응원과 지지 등 동력의 출처는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누군가의 응원과 지지가 얼마나 중요하고 아름다운지를 느끼게 한 건 일본 영화관에서 처음으로 보았던 <사바칸>이라는 영화였다. 

 

‘고등어 통조림’을 뜻하는 ‘사바 칸즈메’를 줄여 부른 말이다. 혼자 일본에 여행하러 와서 해 볼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영화관을 떠올리고 구글 지도를 검색했다. 마침 걷고 있던 후쿠오카 나카스 지역의 오래된 영화관을 찾았고, 시간이 맞는 영화로 <사바칸>을 골랐다. 한국어를 잘하는 연예인으로 알려진 ‘쿠사나기 츠요시(초난강)’가 주연인 작가 역을 맡아 반가웠다. 그의 유년 시절 회상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자전거를 타고 돌고래를 보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두 어린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모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어린이들이 쓰는 일본어 너무 귀엽다!) 이른 아침 부모님 몰래 작은 가방을 챙겨 나가는 길에 아빠를 딱 마주치게 되는데, 혼낼 것 같았던 아빠는 오히려 자전거 안장에 폭신한 천을 깔아주고 주머니에 용돈을 챙겨 준다. 아이들이 모험을 떠나는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아빠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하다. 

 

평탄할 리 없는 여정 속에서 불쑥 나타나 도움을 주는 어른들도 멋있었다. 섬에 도착해 바다에 풍덩 뛰어들었지만 결국 돌고래는 만나지 못하고 펑크난 자전거를 낑낑 끌고 돌아오게 되었다. 다만 두 어린이 사이에는 비밀과 우정이 피어났다. 아이는 지지와 도움, 비밀과 우정으로 자라나는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눈물을 흘렸다. 영화의 제목인 고등어 통조림은 두 어린이 사이의 추억이다. 스시를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가난한 소년은 통조림 고등어로 스시를 만들어 준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가끔 만들어 주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오노미치 숙소와 같은 건물에 있던 작은 친환경 가게에서 한국으로 가져갈 선물을 조금 샀다. 쌀로 만든 면이랑 예쁜 일러스트가 그려진 작은 면수건과 함께 된장으로 양념한 고등어 통조림을 골랐다. 이번 여행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영화와 관련된 선물을 찾았다는 생각에 가방을 풀고 쌀 때마다 흐뭇하게 웃었다. 

 

벼꽃같이 짧았던 여행을 기록하기로 한 내 모험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영영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여행자를 환대해 주고, 만나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들어주고, 떠나는 뒷모습에 손을 흔들어 준 사람들이 모두 활짝 핀 꽃들 같았다. 그 순간만으로도 충분히 충분했지만, 조그만 볍씨를 만들고 싶어졌다. 지지와 비밀과 우정이 가득 담긴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선 글이라는 통로를 선택해 보았다. 그리고 또 다음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빌어 볼 거다. 

 

ここに願う、願う、願う

暗闇に呼んだその名を

胸にきつく抱き願う

物語は続く この僕に

ほら今に咲く、花!

 

-折坂悠太、「朝顔」中

 

여기에 빌어, 빌어, 빌어

어둠속에서 부른 그 이름을

가슴에 꼭 껴안고 빌어

이야기는 계속되고 이런 나에게

봐 지금 피는, 꽃! 

 

-오리사카 유타, ‘나팔꽃’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