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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22

20221206 [일본여행12] 오노미치의 마법

신나는 라이딩을 마치고 자전거를 반납하고 나니 갑자기 무릎이 욱신거리고 엉덩이가 아팠다. 햇빛에 그을린 얼굴은 화끈거리고 몸에서는 땀 냄새가 진동한다. 살아있다는 증거다. 숙소 앞 벤치에 멍한 얼굴로 숨을 고르고 있으니 위층에서 커피 로스팅하는 고소한 향기가 날아와 코에 닿았다. 아로마테라피를 받는 듯 몸이 이완된다. 로스팅을 마친 히로짱이 나를 발견하고 어서 오라는 인사를 한 뒤 커피 한 잔을 내려 준다. 천국이 따로 없다. 멈추지 않는 여행자의 행운에 조금 겁이 난다. 설마 내 남은 삶의 모든 운을 여기서 다 몰아 써 버리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아니야, 일단은 매 순간을 만끽하겠어! 지금 쑤시는 무릎에 닿는 햇살과 바람, 코와 입을 채우는 향긋한 커피, 전혀 알아듣지 못하던 언어가 어느새 귀에 닿아 흥미로운 이야기로 채워지는 신비까지 다 누려줄 테다. 

 

긴 머리에 수염이 덥수룩한 누가 봐도 여행자 하나가 히로짱에게 인사를 하며 나타났다. 히로짱의 커피를 받아 든 고우는 내 옆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니가타에서부터 자동차에 묵으며 목적 없이 여행 중이고 나처럼 어제 오노미치에 도착했다고 했다. 단 한 권 만들어 여행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진 포트폴리오를 꺼내 보여준다. 평생 여행만 했을 것 같은 예술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실은 멀리 떠나는 여행도, 자신의 사진을 모아 책으로 만든 것도 모두 처음 해 보는 시도라고 했다. 함께 살던 파트너가 잠시 독일로 떠나고 찾아온 깊은 상실감이 모험의 동력이 되었다. 

 

첫 장을 펼치면 ‘여행자 사진’이라는 낯선 단어의 한자가 나왔다. 사람이 여행하는 건지 사진이 여행하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지만 일본 사람들도 잘 모르는 특이한 단어라고 소개했다. 흑백의 순간이 잘 담긴 사진들이 인상적이다 싶으면 갑자기 나타나는 컬러 사진이 눈을 끈다. 번쩍하는 순간들이 지나가면 나중에는 사람들이 등장하다가 특이한 빛깔을 담은 자기 집 소파 사진에서 끝이 났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사진 예술만이 담을 수 있는 특권,  시간이 포착되어 의미를 만드는 우연을 운명으로 바꾸는 연금술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사진집을 사이에 두고 여행과 인생과 예술과 꿈을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맛있는 대화가 된다. 이제 머릿속 생각도 일본어로 흐를 정도로 편해졌다. 

 

마침 도쿄에서 고우의 친구가 오노미치에 여행와서 저녁에 같이 밥을 먹기로 했단다. 나에게도 같이 가지 않겠냐고 권해서 함께 상점가를 걸어 ‘마타타비’라는 라면집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온 미용사이자 카레 요리를 하는 CJ와 (DJ에서 디스크를 카레로 바꾼 ‘카레 쟈키’의 약자) 고우는 카레 가게를 하던 또 다른 친구를 통해 단 한 번 만났다고 한다. 언젠가 도쿄에서 가게를 접으며 24시간 카레 파티를 열어 친구들을 마구 초대했단다. 오호라, 소중한 시간을 마무리하는 엄청난 기획에 감탄했다. 이후 에스앤에스로 이어지다가 우연히 서로가 오노미치에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오늘 마타타비에 모였다. CJ가 소셜펀딩으로 야채 카레 통조림 만드는 프로젝트에 성공한 걸 본 고우는 꼭 한 번 그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고 한다. 대량 생산까지는 이어지지 못했지만 그때 그가 만든 작고 예쁜 통조림은 볼 수 있었다.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나 모르게 재밌는 작당이 일어나고 있었군! 

 

6명이 어깨를 마주해야 겨우 앉을 수 있는 카운터 자리밖에 없는 작은 라면 가게 마타타비는 심야 식당처럼 마스터 타카상이 중앙에서 요리를 하고 술을 내어 주는 곳이다. 나란 나란히 앉아서 각자가 좋아하는 술을 마시다 보니 어제 홈파티에서 만난 낸시도 오고 혼자 술 마시러 온 괴짜 청년 키노코도 왔다. 우연히 그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즐거운 수다를 이어갈 수 있었던 건 마스터 타카상의 적절한 질문과 리액션 덕분이었다. 맛있는 라면과 안주를 만드는 동시에 펼쳐지는 현란한 진행이라니! 사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그 상황이 물 흐르듯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중에 일기 쓰면서 마스터의 마법에 무릎을 쳤다. 

 

도쿄에서 이주해 오노미치에 정착한 타카상은 가게 이름을 마타타비로 지었다. 단순히 직역해서 ‘다시 여행’이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취향 저격이었지만) 그 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마타타비가 일본에서는 캣닢을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향정신성 성분을 포함하는 허브의 일종인 셈이다. 옛날 일본에서는 지친 여행자에게 그 잎을 먹이면 계속해서 여행을 이어 갈 힘을 얻는다고 ‘다시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알고 보니 자신이 만든 장소와 음식으로 사람들에게 다시 시작할 힘을 건네고 싶은 타카상의 마음을 담은 이름이었던 거다. 또 눈물이 찔끔 났다. 맞은편 섬에 숙소가 있어 마지막 배를 타야하는 CJ를 배웅하러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이 밖에 나와 있는 걸 보고 타카상은 우리를 사진에 담았다. 나는 사진을 찍는 타카상의 모습을 내 카메라에 몰래 남겨 두었다. 멀어지는 CJ의 뒷모습을 보다가 타카상이 뛰어가더니 다가오는 일요일 오후에 마을에 파티가 있는데 거기에서 카레를 만들어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흔쾌히 수락한 CJ에게 고우는 자신이 신세 지고 있는 전직 쉐프 할아버지(물론 우연히 만난 사람)의 집에서 카레의 밑준비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오노미치에서는 아이디어가 현실에 펼쳐지는 속도가 어마어마하다. 일요일까지 오노미치에 머물지 못해 카레 맛을 못 본 게 지금까지도 한으로 남았다. 오노미치에서 예정된 마지막 밤은 그렇게 마법처럼 멈춘 듯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