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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22

20221207 [일본여행13] 계획은 어긋나야 제맛

오노미치에서 예정된 2박이 끝나는 아침, 마음이 넘쳐서 술렁거린다. 타마짱과 고우가 배웅을 해 주고 싶다고 가기 전에 꼭 연락을 달라고 했다. 오노미치는 빈집 프로젝트로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작은 가게나 이벤트를 이어가고 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지만 굳이 리서치하러 온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다가오는 것들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 숙소 yado의 1층 공유공간에서 스치듯 만난 누군가가 낡은 빈집을 고쳐 여러 가게가 들어가 있는 ‘세 집 아파트’를 만들었다며 들러보라고 했다. 7시 반부터 아침밥을 파는 ‘킷챠우이’라는 가게가 있다는 말에 꼭 가 보고 싶어졌다. 좁은 골목에 손으로 쓴 것 같은 작은 간판들이 가리키는 곳으로 들어가니 작은 마당에 할머니, 엄마, 아빠, 어린이, 강아지(귀여운 시바견이었다)가 옹기종기 앉아 밥을 먹고 있다. 강아지와 셀카를 한 장 찍고 ‘킷챠우이’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 소파 테이블과 주방 옆 식탁 정도가 전부인 작은 식당 가운데에는 커다란 오뎅 나베가 올려진 난로가 있다. 겨울 특별 메뉴로 이번 주에 처음 선보이는 것이라고 들었다. 아침 정식은 두 종류가 있다고 메뉴판 없이 가게 주인인 도이짱이 설명해 준다. 신상인 오뎅 정식을 주문하고 주방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하얀 쌀밥에 미소시루, 반찬 몇 가지와 냄비에서 내가 고른 세 종류의 오뎅이 쟁반 위에 곱게 차려져 나왔다. 천천히 음미하며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나니 내일도 또 먹고 싶다, 아니 매일 먹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타마짱에게 하루 더 묵을 수 있냐고 묻고 (다음 숙소 하루분을 환불 없이 취소하고) 고우에게 하루 더 오노미치에 있기로 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아직 ‘세 집 아파트’의 다른 가게를 둘러 보고 빈집 프로젝트를 더 알아볼 마음의 여유는 없었지만, 오노미치에는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 

 

타마짱이 일부러 시간을 내어 배웅 대신 산책을 함께 해 주었다. 내가 녹차를 좋아한다는 얘길 듣고 오노미치에서 직접 기른 녹차를 파는 가게로 안내했다. 상점가 어딘가에 연결된 한 사람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 끝에 작은 찻집이 나타났다. 아슬아슬한 나무 계단을 오르면 테이블 단 두 개가 있는 다락방이 있다. 점원이 하루 중 딱 지금 시간의 햇빛이 좋다고 말하며 갈대와 마른 꽃을 우리 앞에 장식해 준다. 오래되어 낡고 좁은 나무 건물 다락방에서 친구와 오전 햇살 받으며 앉아 녹차와 화과자와 타이야키(일본 붕어빵)을 먹는다. 여기서는 내내 꿈 같은 풍경 속에 머물게 된다. 너무 고마워서 내가 사겠다는데 너는 멀리서 온 손님이니 당연히 대접받아야 한단다. 알고 보니 타마짱도 런던에서 지낸 적이 있다. 몇몇 지명들을 이야기하며 서로 아는 추억들을 꺼내 놓았다. 갑자기 나에게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묻길래 문득 튀어나온 대답이 ‘나는 내가 되고 싶어’ 였다. 무엇을 할 지보다 어떻게 살 지를 내내 고민하며 살아온 것 같은데 지금의 나에게 다다른 대답이 ‘자신이 되는 것’이었나 보다. 타마짱이 남편인 히로짱의 고향 마을에 정착하게 된 자세한 사연은 듣지 못했지만 지금은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게 전부인 삶이라고 한다. 에이짱과 린짱을 보면 타마짱의 삶의 모양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낯선 이를 경계하지 않고 호기심이 넘치며 어른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는 맑고 단단한 어린이들이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삶은 나에게서 영영 멀어진 것 같지만, 그래서 더욱 타마짱 같은 친구의 삶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곁에서 보고 상상하고 배워야 할 테니까. 나에게 친구는 언제나 학교다. 

 

한국에서 좀처럼 맛있는 녹차를 구할 수 없어 아쉬웠던 참에 가게에서 녹차를 구입할 수 있었다. 특히 바닷가에서 말려 미네랄과 바다향을 느낄 수 있다는 녹차의 맛이 궁금했다. 돌아 나오는 좁은 길 끝에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골목 안 작은 가게를 들여다봤다가 일본 배우 한 명과 코앞에서 눈이 딱 맞았다. 그동안 쉴 새 없이 봐 온 일본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얼굴이라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더니 찡끗하고 웃어 준다. ‘코타키 형제의 사고팔고’의 동생 역을 맡은 개성파 배우인데 타마짱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골목을 빠져나오니 촬영을 준비 중인 스태프들과 구경하는 인파로 상점가가 북적거린다. 타마짱이 구경하던 지인에게 물으니 내년 NHK에서 방영될 드라마라고 했다. 짧은 일본 여행 중에, 게다가 도쿄도 아닌 시골에서 연예인까지 보다니 도대체 이번 여행운은 어디까지 계속될 것인가! 

 

타마짱과의 산책과 오차 데이트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개인실에서 도미토리로 짐을 옮겨 두었다. 마침 도이짱의 옛친구가 놀러 와서 숙소에 함께 찾아왔다. 가게 바깥에서 다시 만난 도이짱에게 행복한 식사였다고 인사하고 내일도 아침 먹으러 가겠다는 약속을 했다. 아침에 도이짱 가게 창가 테이블에 있던 한 분이 자신은 yado 게스트하우스 1층에서 가게를 하는데 어제 나를 봤다며 인사를 했었다. 뭘 파는지 궁금해서 들어가 보니 로컬 오가닉 제품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굉장히 작고 아늑한 가게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오미야게(기념품) 할 만한 걸 찾아 찬찬히 구경하다가 ‘사바칸(고등어 통조림)’을 발견하고 유레카를 외쳤다. 일본 기념품은 아니지만 이번 여행에서 본 영화에 영감을 받은 선물로 딱 맞을 것 같았다. 게다가 커다란 공장에서 찍어낸 게 아니라 지역에서 친환경적으로 만든 것이란다. 지역에서 재배한 쌀로 만든 국수면과 동네 누군가가 일러스트를 그렸다는 예쁜 ‘테누구이(주방용 수건)’도 골라 담았다. 쇼핑을 어려워하는 나에게 선물을 고를 기회마저도 이렇게 딱 맞게 찾아온다. yado에 최대 몇 명까지 묵을 수 있을지 세어 보았다. 스무 명까지는 가능할 것 같다. 벤치에 앉아 언젠가 한국에서 친구들을 잔뜩 데리고 올 즐거운 상상을 하며 헤벌쭉 웃었다.